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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일에 예배에 참석하지 못해 대신 박소영 목사님의 설교 '퀘렌시아(05/21/2017)'를 듣고 '기독교 용어정리' 중 '교회' 편을 읽고 한 주간 생각한 것들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퀘렌시아(Querencia)'는 '투우 경기장에서 투우사와의 싸움에 지친 황소가 거친 숨을 고르며 재충전의 시간을 갖는 장소'와 '피난처, 안식처'를 의미하는 스페인어라고 합니다. 기진맥진했던 황소는 자기만의 안전한 공간에서 투우사와 다시 싸울 힘을 얻고 경기장으로 나설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이 퀘렌시아라는 낯선 단어는 애착이론의 창시자로 유명한 영국의 정신과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존 보울비(John Bowlby)가 말한 '안전기지(Secure base)'를 생각나게 합니다. 이 안전기지란 쉽게 말해 등반가나 탐험가의 휴식처이자 다음을 준비하는 공간인 베이스 캠프와도 같은 개념입니다. 보울비는 엄마 혹은 주양육자와 안정애착이 형성된 아이들의 내면에는 심리적 안전기지가 있어서 탐험가의 베이스 캠프와도 같은 역할을 한다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무조건적으로 나를 보살펴주는,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어떤 상황에서도 나의 편이 되어주는 존재로서의 엄마를 경험한 아이에게는, 엄마와의 이러한 강력한 애착을 형성한 아이의 마음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베이스 캠프가 존재해 엄마를 떠나서 두려움 없이 세상을 탐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힘들 때 언제라도 돌아가 위로와 보살핌을 얻을 수 있는 엄마라는 존재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확실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베이스 캠프가, 안전기지가, 퀘렌시아가 있는 아이는 새로운 인간관계 맺기라는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힘든 일을 겪어도 쉽게 헤쳐나가 결국 건강한 성인으로 성장해 자기실현이라는 행복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고 합니다.

반면 엄마와의 불안정 애착으로 인해 자기만의 퀘렌시아가 없는 아이는 쉽게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며 타인과 세상을 향한 모험에 나서지 못합니다. 성인이 되어서도 우울감과 낮은 자존감에 시달리며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고 결국 사회 부적응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엄마와의 안정 애착을 형성하지 못하고 설상가상으로 어린 시절이 부정적 경험으로 가득한 즉, 각종 학대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자기 실현은 고사하고 평생을 다양한 신체 및 정신 질환에 시달리며 살아갑니다.

우리 속담에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유아기 때의 경험들이 한 사람의 삶을 좌지우지한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1998년 미국의 내과의사인 빈센트 펠리티(Vincent Felitti)박사와 연방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로버트 안다(Robert Anda)박사 연구팀이 1995년부터 1997년 사이에 카이저 헬스플랜을 이용하는 회원 17,421명을 상대로 두 차례 면담과 설문지 작성 등을 이용해 그들의 아동기의 부정적 경험들 즉, 정서적, 신체적, 성적 학대와 신체적, 정서적 방임과 가정폭력 등에 노출된 사례를 수집, 분석했습니다.

이러한 데이터에 근거한 논문 '아동 학대 및 가정 기능장애와 성인기 주요 사망 원인들과의 관계 : 부정적 아동기 경험 연구 [Relationship of Childhood Abuse and Household Dysfunction to Many of the Leading Causes of Death in Adults : the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 (ACE) Study]로 그들은 아동기의 트라우마가 신경계, 면역계, 호르몬계 등에 악영향을 주어 결국 성인기의 신체 및 정신 질환의 주요 원인이 된다는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소아과 의사이자 최초로 캘리포니아주 공중보건국장으로 임명된 네이딘 버크 해리스가 ACE 연구를 토대로 쓴 책 '불행은 어떻게 질병으로 이어지는가 :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신체 건강에 미치는 영향 (The Deepest Well : Healing the Long -Term Effects of Childhood Trauma and Adversity)'에 의하면 펠리티와 안다 박사팀이 만든 '부정적 아동기 경험(the Adverse Childhood Experiences)'을 수치화한 ACE 지수가 높은 사람일수록 즉, 아동기(정확히는 18세 이전까지)에 부모로부터 여러 학대와 방임 등을 당한 사람은, 반복적이고 극심한 신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은 사람은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 비해 매우 높은 비율로 각종 신체 및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1부터 10까지인 ACE 점수가 4 이상인 사람은 0점인 사람에 비해 암과 심장병에 걸릴 가능성이 2배 높고 만성 폐쇄성 폐질환(COPD)에 걸릴 가능성은 3.9배 높다고 합니다. 또한 ACE 점수가 7점 이상인 사람은 점수가 0인 사람에 비해 폐암에 걸릴 가능성이 3배 높으며, 미국인의 사망원인 1위인 허혈성 심장질환에 걸릴 가능성은 3.5배 높다고 합니다. 뇌졸중을 겪을 가능성은 2.4배, 각종 자가면역질환에 걸릴 가능성은 2배 높으며 기대수명은 평균보다 무려 20년이나 짧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각종 신체질환 뿐만 아니라 ACE 점수가 4 이상인 사람은 정신건강에도 심각한 문제를 보여 ACE 점수가 0인 사람에 비해 우울증은 4.6배, 자살기도는 12.2배, 마약 경험은 10.3배 높다고 합니다. ACE 점수가 4점 이상인 아동은 그렇지 않은 아동에 비해 ADHD로 진단받을 확률이 4배 높고, 주의집중이 힘든 사람의 60 퍼센트 이상이 신체적, 성적 학대를 경험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또한 최신 연구들에 의하면 어린 시절의 가혹한 가정 환경이, 트라우마가 인지기능을 저하시켜 노년기에 치매를 유발하는 알츠하이머질환 발병에 영향을 주는 원인임을 밝혀냈습니다. 결국 우리의 건강상태는, 우리의 인생은 어떤 엄마, 아빠를 만나느냐, 어떤 아동기와 청소년기를 보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 듯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받을 수 있는 복 중 최고의 복은 뭐니뭐니해도 부모복이 아닐까합니다.

엄마! 엄마! 이 엄마라는 존재는, 가족이라는 공동체는 누군가에게는 생각만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하느님이 주신 퀘렌시아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애증의 대상이자 남보다도 못한 삶의 걸림돌이 되기도 합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마태 8:20)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습니다. "누가 내 어머니이고 형제자매인가?" 그러고는 곁에 둘러앉은 그들을 보며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내 어머니와 형제들이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 바로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다." (마가 3:33)

예수께서는 이 땅에 퀘렌시아가 없으셨습니다. 안식처가 되어 주어야 할 예수의 가족들은 그가 미쳤다고 잡으러 다녔고, 피난처가 되어 주어야 할 예수의 고향사람들은 그를 벼랑으로 몰아 떨어뜨려 죽이려 했습니다. 희노애락을 함께 했던 예수의 제자들을 그를 배신했고, 예수를 따르던 군중들은 돌변해 그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악을 써댔습니다. 사복음서를 읽으면 읽을수록 세상에 예수처럼 박복한 사람이 있을까, 예수처럼 팔자 사나운 사람이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진정 예수는 고독한 인간이었습니다.

'모든 치유자는 상처 받은 사람이다'라는 칼 융의 말처럼 예수는 치유자이자 상처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상처가, 그의 고뇌가, 그의 고독이, 그의 고난이, 그의 눈물이 그를 진정한 치유자로 만들어 주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께서는 하느님 나라 운동을 통해 당신처럼 이 땅에서 머리 둘 곳 없는 사람들의, 고아와 같은 사람들의 친구가 되어 그들의 피난처이자 안식처가 되어 주셨습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요한 14:18)
'그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4:20)

퀘렌시아 없는 예수께서 퀘렌시아 없는 사람들의 퀘렌시아가 되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유언처럼 '내가 너희들을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즉 서로가 서로의 퀘렌시아가 되어주라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퀘렌시아가 되어주는 관계가, 그런 공동체가 바로 에클라시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헬라어 에클레시아의 동사형은 어떤 일을 중재하기 위해서 부름을 받은 사람이라는 뜻을 내포한다. (중략) 이미 살펴본 대로 예수의 복음은 CCC, 곧 Challenge, Care, Create로 요약할 수 있다. (중략) 이 가운데 지금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사항이 '보살핌(Care)'이다. (중략) 재앙으로 들이닥친 세계적 전염병 앞에서 교회는 온라인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만들어 교우들 간의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교회 본래의 취지가 만남과 보살핌, 사귐과 돌봄에 있다면 이제 그 의미를 실천해 볼 시간이 주어졌다. 위기가 기회가 된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새로운 형태의 교회 생활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새 술은 새 부대에..." ('기독교 용어 정리' 중 '교회'편에서 발췌)

지금, 바로 지금! 팬데믹이라는 전지구적 재앙의 여파가 계속 되고 있는 지금, 역사에 남을 격동의 시기인 지금, 수 많은 가정이 붕괴되어 노숙자로 몰락하고 있는 지금, 온갖 혐오범죄와 증오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지금, 수 많은 사람들이 각자도생의 벼랑길로 내몰리고 있는 지금, 두려움과 우울과 절망과 분노가 우리 사회를 잠식해 들어가고 있는 지금! 바로 지금! '보살핌 (Care)'이라는 예수의 복음은 또 다시 시대적 요청이 되었습니다. 또 다시 교회의 존재 이유이자 목적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한국의 우울증 유병률과 자살률은 20년 째 OECD국가 중 1위를 달리고 있습니다. 또한 미연방질병통제예방센터(CDC)의 발표에 의하면 미주 한인들의 자살로 인한 사망자수가 2021년부터 200명대를 넘어섰습니다. 우리 한인들의 자살률은 미국내 타인종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높은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팬데믹 이전인 2017년 통계를 보더라도 한인 자살률은 3.7 퍼센트로 미국 평균 보다 두 배 이상 높았고, 심지어는 유독 자살률이 높은 것으로 알려진 아메리칸 원주민(3.15 퍼센트)을 능가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한인 자살자의 90퍼센트는 1세대 이민자나 유학생, 주재원, 불법체류자 등으로 자의반타의반 장시간 고립된 생활을 해온 사람들로 밝혀졌습니다. 더군다나 팬데믹을 거치며 경제적 이유나 다른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우울증과 자살충동으로 고통받는 한인들은 점점 더 증가하고 있습니다.

지난 3월 가디나에 위치한 한 한인교회 소속 50대 초반의 모 전도사가 집에서 아내와 8살짜리 딸을 무참히 살해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현장이 너무 처참해 출동한 경찰들도 모두 충격을 받았을 정도라고 합니다. 조사 결과 경제적 문제로 인한 부부간의 다툼 끝에 남편이 흉기로 아내를 먼저 살해하고 이어 딸까지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뉴스에 의하면 '교인들은 모 전도사가 20년 동안 교회에서 언제나 열정적으로 사역했고 성격도 활달해 다른 교인들과도 잘 어울렸지만 평소에 개인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아서 교인들은 그 가정의 힘든 형편을 잘 몰랐다'고 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한 크리스천 가정을 참혹한 비극 속으로 몰아넣은 것일까요? 도대체 무엇이 한 신앙인 가장을 괴물로 만들어 어린 딸마저 무참히 살해하게 만든 것일까요? 그를 사로잡았던 극심한 절망과 분노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왜 그는 20년을 몸 담았던 교회에 자신과 가정의 어려움을 토로하지도 못했던 걸까요? 20년을 그와 함께 한 수 많은 교인들이나 동료 사역자 중 왜 그 누구도 그의 절망과 분노를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요?

어쩌면 그의 절망과 분노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이라기보다 자신과 가정이 위기에 처했는데 솔직히 사는 게 너무 힘들다는 말 한마디 쉽게 나눌 수 있는 사람이 교회 안에 아무도 없는 자기 현실에 대한 절망과 분노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야고보서 5:16)

이 말씀에 의하면 교회는 고백 공동체이자 치유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죄인들의 공동체이자 '고백과 치유를 통해 죄인에서 의인으로 거듭나는 신앙 공동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크리스천은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고백과 치유를 통해 의인으로 변화되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할 이 고백은, 이 치유는 특정인의 의무이자 권리가 아닙니다. '서로' 고백하고, '서로' 기도하라고 했듯이 특정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를 위한 우리 모두의 의무이자 권리인 것입니다.

한데 과연 우리는 우리의 죄를 서로에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병의 근원을 서로에게 고백하고 기도를 요청할 수 있을까요? 배우자에게도, 친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우리의 죄를, 우리의 그림자를, 우리의 은밀한 욕망을, 우리의 실수를, 우리의 어리석음을 서로에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차마 일기장에도 쓸 수 없는 우리의 상처를, 우리의 상실을, 우리의 우울을, 우리의 절망을, 우리의 분노를, 우리의 고통을 서로에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영혼의 어두운 밤(Dark Night of the Soul)'에 대해 서로에게 고백할 수 있을까요? 과연 우리에게 그럴 용기가 있을까요? 과연 그런 영혼의 갈급함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퀘렌시아(Querencia)는 '원하다'의 뜻 스페인어 동사 Querer에서 파생한 단어라고 합니다. 퀘렌시아는 '갈망하다, 향수병, 노스탤지어, 동물의 귀소본능' 등을 의미하기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퀘렌시아가 '자신의 근원으로 돌아가기를, 자신의 근원과 합일되기를 갈망하는 인간의 본능'을 지칭하는 매우 영적인 단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 하느님! 사슴이 목이 말라 헐떡거리며 시냇물을 찾듯이 제 영혼이 목이 말라 주를 찾습니다.' (시편 42:1)

그렇습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근원을 향한 타는 목마름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행자로서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 목마를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갈증을 해소해 줄 생수는 이 땅이 아닌 우리가 떠나온 집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땅의 그 어떤 것도 우리 영혼의 갈증을 해소해주지 못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인생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찾아 야곱의 우물가를 맴돌았던 수가성 사마리아 여인과도 같고, 그 생명수를 마시지 못한 절망감에 엠마오로 돌아가던 글로바와도 같습니다. 이천년전 그들에게도,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타는 목마름이라는 공통된 한계상황이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 모두에게는 영혼의 갈증해소라는 공통된 인생의 목표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우리 현대인은 각종 중독에 포로가 되어 고통받고 있습니다. 약물, 담배, 술, 일, 드라마, SNS, 마약, 섹스, 도박, 쇼핑, 스마트폰, 권력, 로맨스, 음식, 게임, 종교, 포르노, 분노, 불안 등에 애착되어 그것들을 탐닉하며 그것들을 숭배합니다. 중독자들에게는 중독 대상이 곧 자기만의 퀘렌시아이자 자기만의 신인 것입니다. 그것들에게서만 위로를 얻습니다. 그것들로 타는 목마름을 해소하려 합니다. 문제는 그 물이 생수가 아닌 소금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중독이란 '갈증을 바닷물로 풀어보려는 행위'와도 같습니다.

칼 융은 작고하기 5개월 전 1963년 1월 30일, 알콜 중독자들의 단주 자주 모임인 A.A. (Acoholics Anonymous)의 설립자 빌 윌슨(Bill Wilson)에게 보낸 답신에서 알콜 중독에 대해 말하길 "알콜에 대한 갈망은 전체가 되고자 하는 영적 갈망과 같은 것입니다. 단지 저급한 수준에서 일어나는 게 다를 뿐입니다. 그 갈망은 중세시대에 '신과의 합일 (the union with God)'로 표현되었던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알콜은 라틴어로 Spiritus입니다. 우리는 이 단어를 타락시키는 술을 지칭할 때뿐만 아니라 최고의 경험에도 사용합니다. 그러므로 유용한 정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술은 성령으로 다스려라 Spiritus contra spiritum.'"라고 말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중독 전문가이자 신학자인 제랄드 메이(Gerard May)도 자신의 책 '중독과 은혜 (ADDICTION AND GRACE : Love and Spirituality in the Healing of Addictions)'에서 '20년 동안 사람들의 마음속 열망에 귀기울여 온 나는, 모든 인간은 선천적으로 하느님을 향한 욕구를 품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신앙이 있건 없건 간에 이 욕구는 우리의 가장 깊은 바람이며 가장 값진 보물이다. 이 욕구는 우리에게 의미를 부여한다. 어떤 이들은 이 욕구를 억눌러 수많은 관심사들 아래 묻어 버려서 그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혹은 완전함과 완성 또는 성취에 대한 갈망처럼 다른 방식으로 이 욕구를 경험하기도 한다. 우리가 이것을 어떤 식으로 묘사하든지 간에 이것은 사랑에 대한 욕구이다. 이것은 사랑하고자 하는, 사랑 받고자 하는, 사랑의 원천에 좀더 다가가고자 하는 열망이다. 이 욕구는 인간 영혼의 필수 요소, 즉 우리의 가장 강렬한 희망과 가장 고결한 꿈의 근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제랄드 메이도 중독 증상의 본질에 대해 융과 같은 깨달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융은 종교적 체험을 통한 영적 각성만이 중독에서 영원히 해방되는 유일한 길임을 알았습니다. 이러한 융의 놀라운 깨달음을 통해, 신비체험을 통한 영적 각성으로 알콜중독으로부터 해방된 빌 윌슨을 통해, 그가 설립한 '익명의 알콜중독자들 (Acoholics Anonymous)' 모임과 거기에서 파생된 각종 중독자들 모임을 통해 전 세계 수 백만의 중독자들과 그들의 가족들이 자신이 중독자이며 중독자에게 포로된 동반의존증환자라는 고백을 통해, 12 단계(The Twelve Steps)라는 그들만의 영적 회복 과정을 통해, 상호 돌봄을 통해, 영적 각성을 통해 치유와 회복과 거듭남의 놀라운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도 하지 못하고 있는 고백 공동체, 치유 공동체를 만들어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는 야고보서의 가르침을 실천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카톨릭 치유사역자들인 데니스 린, 쉴라 린, 마태오 린은 자신들의 책 '치유와 회복의 끈 소속감 (BELONGING : Bonds of Healing & Recovery)'에서 알콜중독자 모임의 공동 설립자 빌 윌슨의 영적 각성과 그가 깨달은 소속감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빌 윌슨은 자신의 경험을 통해 소속감이 회복과 치유의 열쇠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9살 때 알콜중독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그는 그후 아버지에게서 잠시 느꼈던 소속감을 되찾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끝모를 공허감에 시달리던 그는 20대 초반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서 함께 술을 마시며 취해가는 사람들에게서 소속감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형언할 수 없는 마력에 사로잡혀 의식을 잃을 때까지 술을 마셔대며, 자신이 술을 마시는 그 시간과 공간에, 그런 자신의 삶에, 더 나아가 우주에 소속되었다는 강렬한 느낌을 받으며 서서히 술에 중독되어 갔습니다. 알콜중독자인 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그토록 갈망하던 소속감은 술을 통해 얻었지만 결국 알콜중독자가 된 그는 직장을 잃고 인간관계가 단절되며 몸과 마음이 파괴되어 갔습니다.

빌 윌슨은 결혼 후 매번 아내에게 언제라도 술을 끊을 수 있다고 큰소리쳤지만 폭음은 계속되었습니다. 알콜중독으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던 그에게 마침내 주치의는 당장 술을 끊지 않으면 미쳐서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그 무렵 같은 알콜중독자였던 친구가 찾아와 그에게 하느님께서 술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와주셨다는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았고 설령 하느님이 있다고 한다하더라도 자기에게 관심이나 있을지, 자기를 도와줄 수 있을 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하지만 마침내 그는 어느 날 밤, 병실에서 절망과 분노에 사로잡혀 하느님께 자기도 도와달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진짜 당신이 존재한다면 나를 만나달라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러자 이윽고 믿을 수 없는 일이 그의 눈 앞에 벌어졌습니다. 그는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습니다.

"갑자기 나의 방이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얀 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형언할 수 없는 황홀감에 사로잡혔다. 그때, 나는 마음의 눈으로 산 하나를 보았다. 나는 그 산 정상에 서 있었는데, 그곳은 강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공기가 아닌, 성령의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맑고 강렬한 힘으로 나를 관통했다. 그때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너는 자유인이다.' 깊은 평화가 나를 덮쳤다. 나는 살아계신 진정한 영의 바다처럼 보이는, 현존하시는 분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었다. '이 분이 바로 강렬하게 그리고 실제로 현존하시는 분임에 틀림없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하느님'이라고 생각했다. (중략) 처음으로 나는 '내가 진실로 소속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내가 사랑받고 있고, 그 답례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건 이후 그는 결코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알콜중독이라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빌 윌슨의 놀라운 신비체험과 영적각성은 이천년전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그것과 완벽히 일치합니다. 또한 그의 간증은 다음과 같은 예수님의 약속이 허언이 아니었음을 분명히 증거합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처럼 내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 (요한 14:18)
'그날에 너희는 내가 내 아버지 안에 있고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요한 14:20)

사실 예수님의 이 약속은, 거리를 떠돌던 고아에게 친부모가 찾아오고, 친부모를 찾은 고아가 영원히 친부모와 온전히 하나 되는 이 놀라운 사건은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세례 요한의 침례를 통해 외롭고 치열한 구도자에서 그리스도로 거듭나는 신비체험과 영적각성이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모든 사람에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가능하다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이 약속은, 이 복음은 예수님이나 바울이나 빌 윌슨에게뿐만 아니라 종교와 문화를 초월하여 다양한 영적체험과 그로 인한 영적각성을 통해 수 많은 사람들에게도 실현되었고 지금도 실현되고 있습니다.

"알콜중독자 모임에서 '구원'은 고립된 것에서 빠져나와 '하느님과 사람이 하나된 존재라는 느낌 (하느님과 하나가 된 느낌)', 곧 우리에게 찾아오는 '소속감'에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적대적인 세상에 살지 않는다. 우리는 더 이상 길을 잃거나 무서워하거나 무의미하지 않다." (빌 윌슨)

그런 의미에서 구원이란 소속감의 대상을 바꾸는 것입니다. 애착 상대를 바꾸는 것입니다. 고립된 상태에서 빠져나와 영원하신 그 분과 연결되고, 그 분과 온전히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의 임무는, 존재목적은 각자도생의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고아와 같은 사람들에게 소속감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들과 더불어 서로의 죄를 고백하고, 이 땅의 것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타는 목마름이라는 우리의 한계상황을 위해,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어머니가 되어 주고, 형제자매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건강한 애착대상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퀘렌시아가 되어주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안전기지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서로에게 영적 탐험가를 위한, 구도자를 위한 안전한 베이스 캠프가 되어주어 우리 모두가 진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진짜 엄마를 만나기 위한 탐험의 길로 나서야 합니다.

그 길은 늑대들이 울어대는 어두운 숲 속으로, 우리 내면 깊숙한 곳으로 향해 있습니다. 소름이 돋고 가슴은 요동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호기심이, 알 수 없는 본능이 우리의 발걸음을 그 길로 이끕니다. 마침내 칠흑 같은 내면의 숲 앞에 도착해 한참을 망설이고 있을 때 어디선가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낯설지만 친숙한 목소리가 우리를 향해 속삭입니다.

Welcome to my world!
Won't you come on in?

Miracles I guess.
Still happen now and then.

Step into my heart!
And leave your cares behind.

Welcome to my world!
Built with you in mind.


https://youtu.be/kzjiVWk8k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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