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거리, 생각할 거리

전인민의 간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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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 주일 박원일 목사님의 설교 '목자 - 용어 정리(04/30/2023)'와 설교 리뷰 모임에서 나온 다양한 의견들을 듣고 또한 '기독교 용어정리' 중 '평신도, 평신도 교회'와 '신학 다시 하기'를 읽고 한 주간 제가 생각한 것들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설교의 본문인 요한복음 10장 1절에서부터 16절까지의 내용은 읽을수록 정말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기독교인으로서 기분이 참 민망해집니다. 왜냐하면 두 명의 예수님이 서로 멱살을 잡은 채 서로 내가 진짜라고 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이다. 그래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요한복음 10 : 8)

나중에 온 예수가 자기보다 먼저 온 예수를 향해 '너는 도둑이요 강도'라고, '나는 선한 목자고, 너는 삯꾼 목자'라고 무자비한 인신공격을 퍼붓고 있습니다. 두 목자의 이러한 드잡이를 지켜보고 있는 양떼들은 황당할 뿐입니다. 이것은 마치 어느 교회에서 담임목사파와 실세장로파가 교회 소유권을 놓고 겁에 질린 아이들 앞에서 눈을 부라리고 삿대질을 해대며 돼지 멱따는 소리로 서로를 향해 '너는 사탄이다, 너는 삯꾼 목사다'라고 악을 써대는 진흙탕 싸움을 연상시킵니다.

어쨌든 요한복음의 예수가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라고 언급한 존재는 누구였을까요? 요한복음의 예수에게 '도둑이자 강도'라고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는 존재는 누구였을까요? 또한 '먼저 온 너는 도둑이고 강도고 삯꾼 목자'지만 '나는 선한 목자야'라고 목청 높여 주장하는 요한복음의 '선한 목자 예수'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독일의 역사적 예수 연구자인 요아힘 예레미아스(1900-1979)가 쓴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 신약성서시대의 사회경제사 연구 (한국신학연구소)'에 의하면 예수 시대 당시 팔레스타인 땅에서 목자라는 직업은 '도둑질과 같은 직업' 중 하나이며 따라서 아들들에게 절대로 시켜서는 안되는 매우 혐오스런 직업 중 하나였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당시의 목자들은 대부분 파렴치하고 도벽이 심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위임 받아 돌보는 가축들을 허가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남의 땅으로 함부로 몰고 다녔고, 그 가축들의 소산물을 착복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목자들로부터 양털이나 우유나 양이나 염소의 새끼들을 구매하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의 '나는 선한 목자이다'라는 선언이 만약 역사적 사실이었다면 당대의 유대인 청중에게는 '나는 착한 도둑놈이다', '나는 양심적인 사기꾼이다', '나는 거룩한 장물아비이다' 라는 매우 충격적이고 어처구니 없는 선언으로 들렸을 것입니다. 당대의 상식으로는 '목자'라는 일반명사 앞에는 '파렴치한' 혹은 '속이 시커먼' 혹은 '양심에 털난' 같은 설명이 붙어야지 절대로 '선한'이라는 형용사가 붙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나는 선한 도둑이요 강도니 나를 따르라'는 예수님의 이러한 형용 모순 발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우리는 이것을 진정 역사적 예수의 가르침으로 믿고 따라야 하는 걸까요?

박원일 목사님께서 도마복음 관련 설교들을 통해 여러 차례 소개해 주신 나그 함마디 영지주의 문서 전문가인 일레인 페이걸스는 도마복음 연구서 'BEYOND BELIEF : THE SECRET GOSPEL OF THOMAS' 에서 요한복음과 도마복음의 몇몇 유사점을 근거로 요한복음의 저자(들)은 도마복음서의 가르침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마가, 마태, 누가복음은 예수에게 '하느님의 대리인'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했지만 반면 요한복음은 도마복음과 같이 예수를 '인간의 형상을 입은 하느님의 고유한 빛'으로 형상화했습니다. 하지만 두 복음서의 결론은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인간은 오직 예수 안의 그 신성한 빛을 통해서만 하느님을 경험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반면 도마복음은 그 신성한 빛이, 신성이 예수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내재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저는 요한복음은 도마복음에 대한 반작용으로 탄생한, 도마복음을 견제하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기획생산된 복음서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서와 다른 관점과 색채의 복음서가, 플라톤주의와 영지주의의 향기가 물씬 풍기는 독특한 복음서가 된 것 같습니다. 따라서 저는 오늘 본문은 역사적 예수의 발언이 아닌 요한복음을 생산해낸 공동체의 어떤 절박한 필요에 의해 창조된 가르침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설교의 본문인 요한복음 10장 1절부터 16절은 당시 영지주의의 강력한 영향력에 직면한 요한 신앙공동체 지도부의 불안과 분노와 위기의식이 매우 강하게 느껴집니다. 그들은 예수의 목소리를 빌어 배교를 꿈꾸는 잠재적 이탈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합니다.

'양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다.' (10:1)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고 강도이다.' (10:8)

위 두 구절에서 요한복음 공동체의 리더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는 예수와 다른 예수, 낯선 예수를 전하는 영지주의자들을 도둑이고 강도라 칭하며 정죄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요한 공동체의 가르침에서 이탈해 영지주의자가 된 듯 합니다. 요한 공동체는 도마복음 공동체의 강력한 영향력에 대해 위기의식을 느끼고 신도들의 추가 이탈을 막고자 고민했을 것이고 결국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그 대응책이자 해결책으로 유사 영지주의 복음서인 요한복음을 탄생시켰을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 우리한테도 영지주의 복음 비슷한 상품이, 그것의 매력적인 대체제가, 아니 그것보다 더 탁월한 제품이 생겼으니 굳이 도마복음 공동체로 갈 이유가 있냐고 회유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복음서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지만 요한복음이 영지주의 복음 비슷한 것으로 분칠을 했다고하더라도 결코 온전한 영지주의 복음서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복음의 결론은 예수만이 참 빛이며 예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에 인간은 예수를 통해서만이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반면 영지주의 복음은 우리도 예수처럼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곧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가르칩니다.

최근 한국사회를 발칵 뒤집어놓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기독교 계열 사이비 종교집단들의 실체를 폭로한 '나는 신이다'를 보시고 여러분들도 많은 충격과 분노를 느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예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건들임에도 불구하고 차마 아내에게 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피해의 정도가 매우 심각하고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다큐멘터리와 유사한 작품들로 'Keep Sweet:Pray and Obey'와 'The keepers'가 있습니다. 전자는 몰몬교 분파 집단 교주 부자의 일부다처제 교리를 앞세운 여성 인권 유린과 아동 성착취를 다루고 있고, 후자는 카톨릭 여자 고등학교의 교장이었던 신부가 여학생들에게 저질렀던 성폭력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나는 신이다'처럼 두 다큐멘터리도 끝까지 보기가 매우 힘든 내용들로 가득하지만 이와 같은 비극을 예방하기 위해서, 왜 이런 참극이 되풀이 되는지 그 근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 반드시 봐야할 작품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이와 같은 기독교 계열의 컬트집단이 어찌하여 주로 한국과 미국에서 창궐할까라고 생각하시나요? 왜 다른 종교인들이 아닌 주로 기독교인들이, 특히 기독청년들이 흡혈귀와 같은 사이비 종교 지도자들에게 빠져들어 몸과 마음과 인생이 모두 파탄나는 심각한 피해를 입는다고 생각하시나요?

많은 가족치료사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문제아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정에서, 문제부모에게서 만들어진다고. 마찬가지로 컬트집단의 리더나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자체적으로 어떠한 심리적 결함이 있겠지만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무한경쟁, 각자도생의 삶을 강요하는 병든 사회가 만들어낸 비극적인 존재들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한국과 미국의 주류 기독교와 거기에서 파생된 사이비 종교집단은 공통적으로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반지성주의'라는 두 토대 위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국과 미국 교회에 완전히 뿌리를 내린 '교회공동체 내 남성 지도자의 권위와 권력을 절대화하고 신성시하는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교회 내 자유로운 질문과 토론, 평신도의 비판적 사고능력을 혐오하며 적대시하는 반지성주의'가 예수의 하느님 나라 복음을 변질시키고 수 많은 기독교인들의 이성을 마비시켜 결국 수 많은 교회가 권위주의적 남성목사를 무비판적으로 숭배하는 가부장적 컬트 집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소위 이단교회나 정통교회나 근본적으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측의 수 많은 종교중독자들이 '나는 선한 목자고 너는 삯꾼 목자다', '우리는 정통이고 너희는 이단이다'라고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습니다.

유럽 주요 선진국처럼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전통적 기독교와 전체주의가 몰락하고 대신 양질의 사회복지제도와 양성평등이 자리를 잡고 개인의 성적, 정치적, 종교적 다양성이 존중받고 특정 종교나 정치세력으로부터 생각과 학문의 자유가 침해받지 않는 사회에서는 더 이상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반지성주의를 특징으로하는 근본주의 기독교 교회와 기독교 계열의 컬트집단이 뿌리 내리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통일교, 신천지, JMS, 중앙만민교회, 명성교회, 빛과진리교회, 사랑제일교회 등과 같은 기독교 계열의 컬트집단은 매우 중요한 두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성서관입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신도들에게 창세기의 선악과 이야기에 근거한 원죄와 대속교리로 즉, 구속사적 관점에서만 성서를 바라보도록 교인들을 세뇌시킵니다.

이는 선악과 사건으로 인해 인류는 구제불능의 존재가 되어 자력 구원은 절대 불가능하며 죽음이라는 한계상황과 영원한 형벌로부터 구원받기 위해서는 예수를 메시아이자 하느님으로 믿어야 한다는 교리를 근거로 적당한 때가 되면 '우리의 생사여탈권을 쥔 그 예수가, 그 하느님이 실은 목사, 교주 자기 자신'이라는 주장으로 둔갑하게 됩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주장을 은연중에 간접적으로 하는 사람은 정통교회 목사라 불리우고, 이러한 주장을 노골적으로 대놓고 하는 사람은 이단사이비 교주로 불리우는 것 같습니다.

둘째는 그들의 목사관입니다. 그들은 공통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모든 크리스천들이 하느님 앞에서 평등한 형제자매라고 가르치지 않고 요한복음의 '선한 목자와 양떼'라는 프레임으로 목사와 교인들의 관계를 문자 그대로 양치기와 양떼의 그것으로 치환해 이를 오랜 시간 집요하게 세뇌시킵니다. 이 프레임을 매우 당연한 것으로,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실제로 교회 안에서 한 마리의 양으로 주인의식 없이 피동적으로 무기력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우리는 양이 아니라 발람의 나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지혜로운 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공부로, 교리공부로, 설교로, 하느님의 말씀으로 포장된 이러한 세뇌교육을 집중적으로 받게 되면 멀쩡한 사람도, 교수도, 박사도 결국 비판적 사고능력이 상실되어 목사가, 교주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아무런 의심 없이 이를 하느님의 말씀이라고 믿게 됩니다. 또한 그들이 어떠한 것을 요구하더라도 아무런 저항 없이 맹종하게 됩니다. 이러한 비이성적 환경 속에서 폐쇄적인 종교생활을 계속 하게되면 결국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목사가 교회 세습에 아멘하라고 하면 하고, 똥을 먹으라면 먹고, 빤스를 내리라면 내리고, 배교자를 죽이라고 하면 죽이는 사람이 됩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나 추종자들에게 있어 목사나 교주는 나의 구원과 천국행을 좌지우지하는 존재로, 나의 생사여탈권을 쥔 절대적 존재인 메시아로, 재림예수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으로 마음 깊은 곳에, 무의식 속에 영원히 각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이만희, 이재록, 정명석 같은 이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김삼환, 전광훈 등과 같은 수 많은 이들이 목사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교회 안팎에서 반복음적 전횡을 휘둘러도, 온갖 범죄를 저질러도 비판적 사고능력이 상실된, 군중심리에 사로잡힌, 여러 이해관계로 얽히고 설킨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를 지지하거나 침묵하며 목사들의 사유화된 교회를 떠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대중들이 아무 생각 없이 산다는게 정부로서는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아돌프 히틀러)

저는 주류 기독교의 양날개인 '구속사적 성서이해'와 '목사는 목자, 평신도는 양'이라는 패러다임은 수 많은 한국교회에 팽배한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반지성주의'의 신학적 토대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반복음적, 반시대적 신학에 사로잡힌 교회들은 결국 JMS, 신천지, 만민중앙교회 등과 같은 반사회적, 반인권적 사교집단의 인큐베이터 역활을 하고 있는 셈이며 그 자체로 충분히 컬트 집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슬로건 중 하나가 루터의 '만인 제사장'론입니다. 만인이 제사장이 되려면 만인 신학자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평신도도 목사만큼 공부해야한다는 뜻입니다. 평신도도 목사처럼 설교할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개혁교회가 얼마나 될까요? 진정한 개혁교인이 얼마나 될까요? 평신도도 설교가 가능한, 매주 설교 리뷰 모임과 독서 모임 등으로 비판적 사고능력을 배양하고 있는, '신학 다시 하기'로 전인민의 간부화 아니 '전교인의 목자화'를 추구하는 새길교회가 거의 유일한 정통개혁교회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https://youtu.be/KsaNs_hLp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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