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거리, 생각할 거리

온천 가다 만난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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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 주일 박원일 목사님의 설교 '제 3의 부활 이야기 (04/23/2023)'와 설교 리뷰 모임에서 나온 다양한 의견들을 듣고 또한 '기독교 용어정리' 중 '십자가, 그 불편한 진실'과 '부활, 중생' 편을 읽고 한 주간 제가 생각한 것들을 여러분들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엠마오'라는 지명의 뜻을 찾아보니 '온천 (Village of Warm Springs)'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처형 3일 후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온천 가는 길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예수의 텅 빈 무덤을 뒤로한 채,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의 동지들을 뒤로한 채 엠마오 온천장으로 향하던 두 제자는 누구였을까요? 누가 곁으로 다가와도 모를 정도로 예수 처형과 시신 실종 사건에 대해 갑론을박을 펼치며 집으로 돌아가던 이들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이들 중 유일하게 이름이 거론된 '글로바'는 누구였을까요?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예수의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서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19 : 25)

알고보니 글로바는 예수의 임종을 끝까지 지켰던 네 여인 중 한 여인인 '마리아의 남편'이었습니다. 놀랍게도 부부가 모두 예수의 제자였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위험을 무릅쓰고 예수의 처형 현장까지 함께한 예수의 최측근 제자였습니다. 예수의 가족인 모친과 이모를 제외한다면 예수의 제자 중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만이 막달라 마리아와 함께 죽음을 각오하고 예수와 운명을 같이 한 셈입니다. 그녀는 피투성이 고깃덩어리가 되어 십자가에 매달린 채 짐승 같은 신음소리를 내며 지옥같은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던 예수의 최후를 온 몸과 마음으로 함께 했습니다.

반면 마리아의 남편 글로바는 자신의 스승인 예수가 체포되어 십자가에서 최후를 맞이할 때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남자 제자들처럼 행방이 묘연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아내 곁에도 없었습니다. 마리아는 자신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이 죽음을 무릅쓰고 끝까지 스승 곁을 지키며 그를 향한 변함 없는 사랑과 의리와 신념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남편 글로바는 스승이 무기력하게 체포되자 다른 남자 제자들처럼 자기 살 길 찾기에 급급했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아내 마저도 버려둔 채 줄행랑을 쳤던 것 같습니다.

그런 글로바가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스승의 텅 빈 무덤을 뒤로 한 채, 아내를 예루살렘에 버려둔 채 홀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그와 함께 동행하던 또 다른 제자는 누구였을까요? 같은 동네 사람 혹은 일가친척 중 한 사람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그들은 일어난 이 모든 일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4:14)

그들은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걸까요? 단지 남의 이야기하듯, 강 건너 불구경하듯, 흥미진진한 영화 한 편을 보고 친구랑 수다를 떨듯 그렇게 예수의 죽음과 시신 실종 사건과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여자 제자들의 증언의 진위여부에 대해 갑론을박을 주고 받으며 룰루랄라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던 걸까요? 그들은 한때 자신들의 인생을 걸었던 스승을 배신하고 심지어 아내도 사지에 내팽겨쳐두고 자기들만 살겠다고 도망쳐 나왔는데 무슨 낯짝으로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요? 아마도 그런 자신들의 비겁한 행동을 합리화시키는 이야기를 서로 나누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우리는 그동안 예수를 위해 할 만큼 했다, 정말 최선을 다했다, 우리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를 따랐다, 일가친척들에게 예수에게 미친 놈들이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우리는 예수에게 헌신했다, 그런데 남은 게 뭐냐? 이게 도대체 뭐냐? 우리 꼬라지가 이게 뭐냐? 당장이라도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건설할 듯 기세등등하던 예수는 그토록 허망하게 죽어버리고, 툭하면 내가 예수의 오른팔이네 왼팔이네, 예수 다음으로 누가 더 높네 낮네하며 드잡이하던 갈릴리놈들은 다 도망가버리고, 내가 모시는 예수가 바로 우리 민족을 구원할 메시아이자 하느님의 아들이네 어쩌네하며 순진한 사람들 죄다 끌어모으고, 그분 옷자락만 만져도 무슨 병이라도 낫네 마네하며, '에헴! 내가 바로 그런 분한테 금맥기한 천국열쇠를 받은 사람이오'하며 온갖 개폼은 다 잡고 돌아다니던 돌땡이인지 돌대가리인지 하는 그 갈릴리 뱃놈은 제일 먼저 토껴버리고, 온갖 허드렛일하며 그런 미친 놈들 따라다니던 여자들은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는 헛소리를 해댈만큼 완전히 단체로 돌아버렸고, 그래서 내가 마리아한테 이제 다 끝났으니 그만 다 잊고 집으로 돌아가자 어르고 달래도 눈 하나 꿈쩍을 안하더라고, 아이고, 이 여편네야, 정신 좀 차려! 애새끼들 생각도 해야지, 아무리 머리 끄댕이를 잡고 개 잡듯 두들겨패도, 완전히 미친년처럼 눈_깔을 희번득거리며 할렐루야! 아싸라비야! 콜롬비야! 우리 예수가 살아났네 뭐네하며 바락바락 악을 써대니, 아이고! 내 팔자야! 이제 무슨 낯짝으로 부모님을 뵈며, 집안 어른들을 뵈며, 또 동네 사람들한테는 뭐라고 둘러대냐?"

"그러게요, 형님! 우리 꼬라지가 완전 개jot같이 되버렸네요. 역시 어르신들 말씀 틀린 거 하나 없어요. 갈릴리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냐? 자기가 예언자네 메시아네 어쩌구저쩌구하는 인간치고 제 명에 죽는 놈 못봤다, 그러니 너희도 그런 인간 곁에 얼씬도 마라. 까딱하면 패가망신한다! 그러셨잖아요."

"그러게 말이다. 한데 마누라가 우리 예수는 다르다, 그 양반의 가르침과 행동거지가 보통이 아니다, 예수를 만나 참소망이 생겼다, 그러니 당신도 예수에게 인생을 걸어라! 이러면서 나를 살살 꼬시는 바람에, 니_미 씨벌! 거기에 홀딱 넘어가 이게 도대체 무슨 망신이냐? 쪽팔려 죽겠네. 생각 같아서는 나도 가롯 유다처럼 그냥 칵!"

"아이고, 형님! 그런 무서운 말씀하지 마세요! 죽긴 왜 죽어요?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라는 말도 있잖아요? 더군다나 우리한테 딸린 애새끼들이 한 둘이예요? 연로하신 부모님들 생각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야죠! 살 사람은 살아야죠!"

"그렇지, 살 사람은 살아야지? 예수 죽었다고 우리까지 죽으면 안되겠지?"

"그럼요, 형님! 까딱했으면 우리도 예수랑 엮여서 큰 일 날 뻔 했어요."

"내가 이제 예언자네 메시아네하는 이런 인간 또 쫒아다니면 내 양 손에 장을 지진다. 아니, 성을 간다, 성을 갈어! 니_미럴!"

"네, 네, 형님! 우리 과거는 싹 다 잊고 새출발하자구요. 형님도 이 참에 예수때메 실성하신 형수님 깨끗이 잊으시고, 연로하신 부모님과 애들 생각해서라도 새출발하세요. 제 여편네 사돈의 팔촌 중에 마르다라고 12살 먹은 아주 참하고 튼실한 애가 하나 있는데, 집이 워낙 째지게 가난해 나귀 새끼 한 마리 정도면 충분히..."

'그들이 이야기하며 토론하고 있는데 예수께서 가까이 가서 그들과 함께 걸어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눈이 가려져서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누가복음 24:15-16)

누가복음에 의하면 이 두 제자에게 부활하신 예수께서 다가오셨지만 그들의 눈이 가려져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마가복음에는 예수께서 전과는 달라진 모습으로 그들 앞에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이를 종합해 볼 때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길 위에서 조우했던 그 누군가는 예수가 아니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분명 그 길 위에서 누군가를 만났고, 그 만남을 통해 예수께서 부활하셨음을 깨닫게 되었고, 이 놀라운 소식을 다른 제자들에게도 전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길 위에서 만났던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요한이 말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어떤 사람을 보고 우리를 따르는 자가 아니어서 우리가 그에게 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못하게 하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행하고 나서 바로 나를 욕할 사람은 없다. 누구든지 우리를 반대하지 않으면 우리 편이다." (마가복음 9:38-40)

이와 같은 기록을 통해 우리는 예수의 공생애 시기에 예수처럼 귀신들린 자들을 온전케해주던, 예수와 같은 초능력을 지닌 또 다른 그 누군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를 따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기적을 행했습니다. 이를 목격한 제자들은 짝퉁 예수의 초능력에 경악했고 이거 지금 정리 안해두면 예수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칭 '갈릴리 예수파' 2인자인 베드로의 '자, 드가자!'라는 우렁찬 명령이 떨어지자 12명이 떼거지로 달려들어 각기 쇠파이프와 자전거 체인 등을 흔들어대며 '어이, 형씨! 누구 허락받고 감히 우리 큰형님 존함을 함부로 쓰는 거야? 이 동네는 우리 나와바리야! 여기가 어디라고 감히 영업방해를 하는 거야? 그것도 무면허로? 뒈지고 싶어 환장했어?'라며 그의 구마의식을 방해했던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이 사건이 기독교 역사에서 끊이지 않았던, 지금도 진행 중인 정통이단 시비의 시발점이 아니었을까합니다. 어쨌든 예수께서는 웃통 까고 눈을 부라리며 정통 기독교 수호를 위해 실력행사에 나섰던 제자들을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하신 게 아니라 놀랍게도 그들의 행동을 나무라시며 오히려 짝퉁 예수의 사역을 옹호하십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때려잡아야할 이단사이비 짝퉁 예수로 보였던, 하지만 예수는 당신과 같은 편 즉 동역자로 여겼던 그는 과연 누구였을까요?

절망과 혼란과 죄책감에 사로잡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길 위에서 그 누군가를 만났습니다. 그는 그들이 예수의 제자들이라는 사실을 알게되자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닫지 못함을 질책하며 예수의 삶과 죽음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그들의 마음에 심어주었습니다. 마침내 엠마오에 도착한 두 제자는 길 위에서 만난 낯선 이를, 자신들에게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불어넣어준 이 낯선 이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이 낯선 이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빵'을 나누어 줍니다. 그들이 정체를 알 수 없는 낯선 이가 나누어준 성분을 알 수 없는 낯선 빵을 먹자 이 낯선 이가 친숙한 예수로 변모하는 믿을 수 없는 기적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이내 이 친숙한 예수는 그들 앞에서 흔적도 없이 유령처럼 사라져 버립니다. 두 제자는 이러한 신비체험을 통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깊이 깨닫고 예수의 제자에서 그리스도로 거듭납니다.

두 제자들이 겪은 '전설의 고향'이나 '엑스 파일'과 같은 드라마에서 볼 법한 이 극적이고 미스테리한 사건은 바울의 회심 즉, 사도행전이 전하는 다메섹 도상에서의 신비체험을 연상시킵니다. 매우 흥미롭게도 두 사건 모두 '예수 부활 사건을 의심하거나 부정하는 남자'가 '생명과 죽음의 상징인 물과 관련된 곳'인 엠마오(온천)와 다메섹(물 대기 좋은 땅)으로 가던 '길 위'에서 '자신이 부활한 예수라고 주장하는 신비한 존재와의 만남'을 통해 '즉각적인 회심을 경험'하고 마침내 '전도자의 삶을 살게 되나 이들의 주장은 의심 받고 거부된다'는 매우 유사한 신화적 서사 구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구도의 삶을 살던 예수가 세례 요한이 베푸는 침례를 받기 위해, 구도자 예수에서 그리스도로 거듭나기 위해,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이 죽음을 각오하고 건너야했던 그 요단강을 향해 걸어갔듯이 두 제자 역시 엠마오를 향해, 솟구치는 따스한 물을 향해 걸어갑니다. 침례의 세 가지 상징 즉, 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죽음'을 상징하며, 물에 완전히 잠기는 것은 '매장'을 상징하며, 물 밖으로 나오는 것은 '부활'을 상징한다고 했을 때 두 제자가 '솟구치는 따스한 물'인 엠마오를 향해 걸어간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고, 엠마오 자신의 집에 들어간 것은 죽어서 '매장'된 것을 의미하고, 엠마오에서 다시 나와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것은 '부활'을 의미합니다. 즉, 두 사람은 부활한 예수를 만나 예수처럼 죽었고, 매장됐고, 부활했습니다. 다시 말해 이들도 예수처럼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허망한 죽음에 실망하고 좌절한 두 제자가 낙향하다가 길 위에서 낯선 예수를 만난다는 이 매혹적인 이야기의 핵심은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이가 전하는 낯선 복음을 통해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다'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러한 인간 구원의 고차 방정식은 또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도 나타납니다. 한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길 위에서 죽어갈 때 그를 구원한 존재는 제사장이나 레위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피 흘리며 죽어가던 그를 외면하고 도망쳤습니다.

믿었던 존재들에게서 버림 받은 그를 구원한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그가 평소에 그토록 혐오하고 증오하던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익숙하고 편안하고 이해 가능한 존재가 아니라 불편하고 두렵고 기이한 존재가 그를 구원했습니다. 친숙한 선이 아니라 낯선 악이 그를 구원했습니다. 타인의 빛이 아닌 자신의 그림자가 그를 구원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비유의 가르침은 율법이 제시하고 있는 이웃 사랑의 범위를 혁명적으로 확장시켰다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이 비유는 우리에게 구원의 역설과 구원의 신비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상식과 믿음을 일거에 붕괴시키는 이러한 역설과 신비가 하느님 나라 복음의 본질이자 그리스도의 진짜 얼굴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길 위에서 만난 낯선 예수가 전한 익숙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낯선 복음을 듣고, 낯선 예수가 나누어 준 낯선 빵을 먹고 제자에서 그리스도로 거듭난 두 사람은 즉시 자신의 집을 떠나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이들은 다른 제자들에게 자신들이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음을 증거했습니다. 길 위에서 만났던 낯선 이가 자신들에게 했듯이 엠마오 출신의 두 그리스도도 자신들이 깨달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참된 의미를 예수의 제자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은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막달라 마리아의 복음도 거부했듯이 엠마오에서 돌아온 두 그리스도의 복음도 거부했습니다. 그 이유는 제 생각에 그들은 그러한 복음의 씨앗이 뿌리를 내릴 수 있는 마음밭을 가지고 있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또한 그들은 만약 예수께서 정말로 부활하셨다면 조상대대로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던 하찮은 여자들이나 듣보잡 제자들이 아닌 자기들 성골 제자들을 먼저 찾아오셨을거라고 생각한 듯 합니다.

하지만 예수를 따랐던 사람들이 점차로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새로운 복음에 귀를 기울이고 먼저 깨달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개인적인 영적 체험을 통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나오기 시작하자 이러한 예상치 못한 사태에 당황한 베드로를 비롯한 성골 제자들은 '육체로 부활해 자기들에게 먼저 나타난 예수'를 필요로하게 되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자기들은 만날 수 없는 영적 체험 속 부활한 예수가 아닌 눈에 보일 뿐만 아니라 손으로도 만져지는 그런 생생한 육체를 가지고 부활해 자기들이랑 밥도 먹고 술도 먹고 사우나도 하다가 예수라는 상표권과 교회 설립과 운영에 관한 독점적 권리를 자신들에게만 넘겨준 뒤 이 땅을 심판하러 언젠가 다시 돌아오겠노라 약속하고 헬륨 가스 든 풍선처럼 둥실둥실 떠올라 대기권 밖으로 사라져 버리는 그런 차별화된 예수를 필요로 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 역사에는 두 종류의 부활하신 예수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첫째는 개인적인 영적 체험을 통해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참된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 즉, 그리스도들이 만났고 지금도 만나고 있는 예수가 있습니다. 둘째는 그런 깊은 영적 체험을 하지 못했거나 이를 부정하거나 아예 관심도 없는 자칭 크리스천들의 종교적 혹은 정치적 혹은 경제적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교리 상으로만 존재하는 부활한 예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중에서 어떤 예수를 만날 수 있는가는 온전히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에 관한 특정 개인이나 특정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나 가르침을 무비판적으로 맹신하며 따를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예수의 제자에서 그리스도로 거듭나고자하는 깊은 영적 열망을 가지고 이를 힘써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예수와 같은 치열한 구도의 삶을 살 것인가?

https://youtu.be/HezSgE7cB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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