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거리, 생각할 거리

You've got a fri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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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난 주일 박원일 목사님의 설교 '다른 보혜사(05/14/2023)'와 '파라클레도(05/22/2022)', '성령-내재자 하느님(07/15/2012)'을 듣고 '기독교 용어정리' 중 '성령'편을 읽고 제가 한 주간 생각한 것들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성령'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종소리에 조건반사적으로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즉각적으로 심연으로부터 떠오르는 어떤 원초적인 소리들과 몸짓들과 냄새들과 풍경들이 있습니다.

"아쌰봐야! 아쌰봐야! 아쌰봐야! 쌰빠따찌따미야쏴바까야... 쌰빠따찌따미야쏴바까야... 쌰빠따찌따미야쏴바까야... 오,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오늘 밤 우리의 간절한 기도를 들으시고 이 자리에 성령께서 와 계십니다. 이 시간, 여러분들이 진정 회개하면, 여러분의 은밀한 죄, 더러운 죄, 음란한 죄, 알고 지은 죄, 모르고 지은 죄, 다 토해내고 자복하면 성령께서 오늘 밤 역사하셔서 폐병이 낫고, 암환자가 낫고, 앉은뱅이가 일어나고, 소경이 앞을 보고, 한 길로 왔던 더러운 귀신들이 일곱 길로 도망가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믿으시면 아멘하세요! 아멘? 아멘? 아멘! 할렐루야!"

1980년대 초반, 어느 여름 밤, 잠실 새마을 시장 한켠 공터에 세워진 카키색의 거대한 군용 천막, '와 보라! 불의 종, 능력의 종, 신유의 종, 왕바울 목사 초청 치유대성회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라는 궁서체 붉은 색 글귀가 박힌 현수막, 천막 안 어둠을 밝히던 삼십촉짜리 전등 몇 개, 가슴을 뛰게하던 강렬한 북소리, 바닥에 빼꼭히 앉아 미친듯이 박수를 치며 빠른 템포의 찬송가를 부르던 사람들, 천막 안에 가득했던 열기와 땀냄새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그로테스크한 방언들과 신들린 듯한 격렬한 몸짓들, 비명소리처럼 들리던 '주여!' 라는 부르짖음, 백구두에 흰 양복을 입고 흰 손수건으로 이마와 목덜미의 땀을 연신 닦아내며 잔뜩 쉰 목소리로 "나사렛 옛쑤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더러운 귀신아! 나가라!"를 외치던 중년의 부흥사, 비명을 지른 뒤 토하던 남자, 눈이 뒤집힌 채 거품을 물고 몸부림치던 여자, 아이들의 울음소리, 목발을 집어던지고 겅중겅중 뛰던 남자, 그를 향한 환호성과 박수소리...

그때 저는 마침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에 관한 책에 푹 빠져있었는데 천막 부흥회의 그로테스크한 풍경들이 지구 종말의 한 징조처럼 느껴졌습니다. 초등학교 4, 5학년 쯤 되었던 저의 눈에 비친 천막부흥회의 모든 것들이, 그 낯섬과 기괴함과 두려움과 놀라움과 혐오스러운 느낌들이 성령에 대한 첫인상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4대째 장로교 집안에서 태어나 성장하던 저에게 천막 부흥회의 모든 것들은, 소위 성령의 역사는 교회에서는 결코 볼 수 없었던 기독교의 또 다른 얼굴이었습니다.

제 나이 30대 초반, 어느 해 겨울, 지인의 초대로, 지인에 의하면 '성령 충만하다'라는 한 교회의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잠실 석촌 호수 뒷편 한 건물 지하에 자리 잡은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그려진 벽화들이 있었는데 한쪽 벽에는 흰 옷을 입고 백마를 탄 예수님의 입에서 화염에 휩싸인 검이 레이져 광선처럼 뿜어져 나오는 성화(?)와 반대편 벽에는 네 발 달린 용을 향해 포효하고 있는 거대한 사자의 그림이 제 시선을 단번에 사로 잡았습니다.

지인 왈, 이 교회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더불어 사자의 영을 섬긴다'고, 사자는 이스라엘 12지파 중 하나인 유다 지파의 상징이자 성령의 상징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시간이 되자 삼삼오오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던 30여명의 교인들이 방석을 깔고 나란히 정렬해 앉았습니다. 십자가가 걸려있는 강대상 앞에는 큰 북이 하나 놓여 있었고 잠시 후 하얀 드레스를 입은,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50대 초반의 여자가 들어왔습니다. 지인은 "저 분이 바로 선지자예요"라고 귀뜸해 주었습니다.

'오늘 밤 사자의 영을 받아 마귀를 쳐부수러 가자'는 선지자의 설교 비슷한 것이 끝나고 선지자가 느닷없이 북을 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기다렸다는 듯 일제히 일어나 한구석에 놓여있던 소고, 나팔, 깃발, 장난감 칼 등을 하나씩 챙겨들고는 한 줄로 서기 시작했습니다. 지인은 이제 곧 영적 전쟁이 시작된다고 일러주었습니다. '음... 영적 전쟁이라...' 결국 예의상 혹은 얼떨결에 저도 지인과 함께 그 줄 꼬리에 붙어 섰습니다.

선지자의 힘찬 북소리에 맞춰 사람들은 깃발을 흔들어대며, 나팔을 불어대며, 몽둥이를 휘둘러 대며 교회 안을 이리저리 빙빙 돌며 영적 전쟁터를 향해 나아갔습니다. 저도 졸지에 부모님께 연락도 못드리고 어딘지 알 수도 없는 전쟁터로 가야만 했습니다. 북소리의 템포가 점점 더 빨라지고 거친 호흡을 몰아쉬던 선지자의 얼굴이 몇 번 씰룩거리더니만 순간 사자의 얼굴로 변했습니다. 제 눈을 의심했지만 분명 선지자는 사자로 변해 으르렁대더니만 마침내 엄청난 소리로 포효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정 사자의 영이 임한 듯 했습니다.

암사자가 미친듯이 북을 쳐대며 포효하자 교회 안 분위기가 최고조에 다다랐고 어느 한순간 교인들이 기절하듯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입신상태가 되었습니다. 혼자 서있거나 앉아있기도 뻘쭘해서 저 역시 누워서 한 삼십분쯤 있다보니 벌써 영적 전쟁이 다 끝났는지 한 두 사람씩 일어나 앉기 시작했습니다. 선지자의 얼굴도 사자에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습니다. 선지자가 영적 전쟁 중 각자가 본 환상들을 보고해달라고 하자 한 사람씩 나와 자기가 입신상태에서 본 것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뒤로도 제가 경험한 성령은, 성령의 역사는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먼 당신이자 저의 일상의 삶과는 너무나도 유리된 특수한, 기이한 현상일 뿐이었습니다. 지금은 인식이 많이 바뀌었지만 30대까지는 저에게 있어 성령이란 기독교 보다는 무속 신앙에, 교회 보다는 굿판에 더 어울리는 존재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 운운하는 사람들을 만나면 최대한 거리를 두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을 하고 살아왔습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할 것이니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다른 보혜사를 보내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요한 14:16)

요한복음의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나고 난뒤 아버지에게 부탁해 자신을 대신 할 다른 보혜사를, 진리의 영을 그들에게 보내주겠노라 약속하십니다. 나 대신 다른 보혜사를 보내신다는 것은 예수께서도 보혜사셨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보혜사는 무슨 말일까요?

'보혜사'는 강원도 홍천군 홍천읍에 있는 사찰 이름이 아니라 희랍어 '파라클레토스'를 번역한 한자어라고 합니다. 도울 '보', 은혜 '혜', 스승 '사', 이 세 가지 글자가 조합된 단어인 보혜사의 뜻을 풀어보자면 '은혜로 돕는 스승' 정도가 되는 것 같습니다. 파라클레토스는 '~의 옆'을 의미하는 '파라'와 '부르다, 초대하다'는 뜻을 가진 '칼레오'가 결합된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인데 직역하자면 '돕기 위해 곁에 부름을 받은자 (summoned, called to one's side, especially called to one's aid)'를 의미합니다. 영어성경에는 'Comforter', 'Advocate', 'Mediator', 'Counselor', 'Helper', 'Friend'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참고로 북미 원주민들이 자신들의 고유한 문화와 영성에 근거해 자체적으로 번역한 신약성서(FIRST NATIONS VERSION : An INDIGENOUS TRANSLATION of the NEW TESTAMENT)에는 파라클레토스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I will ask the Father to send one who will always walk beside you and guide you on the good road."

북미 원주민들에게 있어 보혜사란 자신의 여행길에, 인생길에서 언제나 동행하는 친구같은 존재이자 자신을 좋은 길로 인도하는 아버지나 선생님같은 존재입니다. 즉, 믿을 수 있는 친밀한 길동무이자 유능하고 노련한 여행 가이드인 셈입니다. 이는 에베레스트나 칸첸중가와 같은 산에 도전하는 등반가의 필수 동반자인 네팔의 쉐르파(Sherpa) 족과 같은 전문 가이드와 같은 특별한 존재인 것입니다. 어떤 쉐르파를 만나느냐에 따라 등반 성공이 좌우되며 더 나아가 등반가의 생사유무가 결정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고단한 인생길에서도, 참 나를, 참 하느님을 찾아가는 우리의 구도의 삶에서도 이런 든든한 가이드가 있으면 좋지 않을까요? 아니 꼭 있어야 할 존재가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에게 꼭 필요한 보혜사 성령님은, 예수께서 하느님에게 부탁해 당신의 제자들에게, 더 나아가 우리들에게도 보내주시겠노라 약속하신 파라클레토스는 도대체 어디에 계신 것일까요? 여의도순복음교회에 계시는 걸까요? 아니면 한얼산 기도원에 계시는 걸까요? 이도저도 아니면 이천년전 오순절 때 마가의 다락방에 잠시 들리셨다가 다시 하늘나라로 돌아가신 것일까요? 그래서 저는 보혜사 성령이 어디에 계신지 한번 찾아보기로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으니 내가 그에게 알맞은 돕는 배필을 만들어 주겠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 흙으로 온갖 들짐승들과 공중의 온갖 새들을 빚으시고 그것들을 아담에게로 데려오셔서 그가 어떻게 이름을 짓는지 보셨습니다. 아담이 각 생물을 무엇이라 부르든지 그것이 그의 이름이 됐습니다. 아담이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모든 들짐승에게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자기에게 알맞은 돕는 배필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시니 그가 잠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갈비뼈 하나를 취하시고 살로 대신 채우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비뼈로 여자를 지으시고 그녀를 아담에게 데려오셨습니다. 아담이 말했습니다. "드디어 내 뼈 가운데 뼈요 내 살 가운데 살이 나타났구나. 이가 남자에게서 취해졌으니 여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그 아내와 결합해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둘 다 벌거벗었지만 서로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창세기 2:18 - 25)

위 내용은 주로 목사님들의 주례사에서 흔히 등장하는 내용들로 가득한데 '사람이 독신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좋지 않은 일이니 반드시 결혼해 가정을 꾸리는 것이 하느님의 창조질서에 순종하는 길이고 복 받는 길이다' 또는 '여자는 남자를 위해 돕는 배필로 창조된 만큼 아내는 남편을 잘 내조해야 하고 순종해야 하며 남편은 자기 갈비뼈로 만들어진 아내를 소중히 여기고 자기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또는 '남자와 여자가 결혼했으면 원가족으로부터, 각자의 부모로부터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독립해 성숙한 부부가 되어야 한다' 등등...

다 그럴듯한 말씀들인데 과연 위 본문이 그런 상식적인 의미에 그치고 말법한 내용들일까요? 이 본문에 대한 저의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위 본문에 의하면 창세기의 하느님이 사람(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뒤늦게 깨달으시고 그를 위해 '그에게 딱 맞는 도우미'를 만들어 주겠노라 결심하십니다. 'I will make a helper suitable for him!'

한글로는 '돕는 배필, 돕는 사람' 등으로, 영어로는 'a helper'로 번역된 히브리어 단어는 '도움'이라는 명사 '에제르(ezer)'에서 파생된 '에제르 케네그도(Ezer Kenegdo)'입니다. 에제르라는 명사는 구약에서 21번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위 본문에서 두 번 사용되었고 나머지 19번은 모두 하느님과 관련된 명사라고 합니다. 즉, '에제르'는 '인간의 도움' 아닌 '하느님의 도움'이며 따라서 '에제르 케네그도'는 인간을 돕는 신적 존재를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아담(사람)에게 만들어 주시려는 존재는 비슷한 수준의 사람이 아닌 우월한 신적 조력자입니다. 인간을 돕는 이 전지전능한 신적 조력자의 다른 이름이 바로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파라클레토스'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다시 말해 창세기 2장에서 여호와 하느님은 어떤 한계상황에 처한 인류 최초의 사람을 돕기 위해, 구원하기 위해 맞춤형 파라클레토스를 만들어 보내시기로 작정하신 것입니다.

한데 당황스러운 것은 하느님이 아담을 위해 '에제르 케네그도' 즉 신적 조력자를 만들겠노라 하시고 같은 인간이 아닌 각종 동물들을 만들어 그의 앞으로 끌고 오십니다. 만약 기존의 전통적인 본문 해석대로라면 하느님은 아담에게 여자 대신 각종 동물들 중에서 섹스 파트너이자 가사 도우미를 골라 보라고 하신 셈입니다. 창세기를 문자 그대로 믿는, 역사적 사건으로 믿는 수 많은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장면이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수간을 주선하고 있는 기절초풍할 장면이 되어버립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사건을 상징적인, 신화적인 의미로 풀어 볼 수 있습니다.

어쨌든 아담은 하느님께서 친히 주선하신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모든 들짐승'과의 인류 최초의 소개팅에서, 최소 백만종은 되었을 동물들의 각기 다른 특성까지 모두 파악해 일일이 다 이름까지 지어주느라 수 십년 혹은 수 백년 어쩌면 천년이 넘게 걸렸을지도 모를 기나 긴 맞선 자리에서 불행히도 자신에게 꼭 맞는 '에제르 케네그도' 혹은 '파라클레토스'를 찾지 못합니다. 아담이 눈이 높았던 걸까요? 아니면 하느님의 눈이 낮았던 걸까요? 만약 아담이 이때 자신의 이상형을 못만났다하더라도 창조주인 하느님의 성의를 봐서 혹은 백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살다보면 정 들겠지라는 생각으로 그냥 '모든 가축과 공중의 새와 모든 들짐승' 중에서 돕는 배필을 골랐다면 지구의 주인은 지금의 호모싸피엔스가 아닌 켄타우로스 같은 반인반수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상상을 해봅니다.

참고로 아담이 수 많은 동물들 중에서 자기의 배필을 찾지 못했지만 결국 자신의 진정한 짝인, 천생연분인 하와를 만난다는 이야기는 우리 고조선의 건국신화에서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이 동물 상태에서 머물러 있는 곰이 아닌 인간으로 거듭난 웅녀와 결혼한다는 이야기를 연상시킵니다. 두 신화의 흥미로운 공통점은 아담에게 '하느님처럼 되고 싶다면 선악과를 먹어라'와 곰에게는 '인간이 되고 싶다면 쑥과 마늘을 먹어라'라는 도전과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한층 더 높은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금기를 깨야만 했던 것입니다.

어쨌든 피조물 주제에 창조주가 보낸 수 많은 신부 후보군 중에서 짝을 고르지 않은, 쓸데없이 눈만 높은 아담 때문에 매우 자존심이 상하셨을 하느님께서 아담을 재우십니다. 이 말은 곧 아담이 죽었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아담은 이 죽음을 통해 살아있는 동안에는 만날 수 없었던, 하느님이 만들어 보낸 수 많은 짐승들 중에서는 찾을 수 없었던 진정한 의미의 '에제르 케네그도', '파라클레토스'를 만납니다. 하느님은 죽은 아담의 갈비뼈를 취하셔서 그를 위한 신적 조력자를 만드십니다.

흙으로 아담을 빚으시고 그 코에 당신의 숨을 불어넣어 그를 생명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이제 수메르어로 '생명'을 의미하는 그의 갈비뼈를 취해 또한 '생명'을 뜻하는 하와라는 신적 조력자를 만드셨습니다. 자신의 외부에서 온 동물들 중에서, 신적 조력자들 중에서 자신에게 꼭 필요한 존재를 찾지 못해 결국 죽음에 이르렀던 아담은 마침내 자신의 갈비뼈로부터 나온, 즉 자신의 생명으로부터 나온 또 다른 생명인 하와가 나타나자 죽음에서 깨어나 다음과 같이 탄성을 지릅니다.

"드디어 내 뼈 가운데 뼈요 내 살 가운데 살이 나타났구나!"

아담은 그동안 애타게 찾던, 학수고대하며 기다리던 진짜 에제르 케네그도를 드디어 만났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하와가 아담의 외부가 아닌 내부에서 온 존재라는 것입니다. 동물들이라는 에제르 케네그도는 외부의 흙으로 만들어진 반면 하와라는 에제르 케네그도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들어 졌습니다. 아담의 진짜 에제르 케네그도는 그의 안에 내재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 아담의, 우리 인간의 '에제르 케네그도'는, '파라클레토스'는 외부에서 찾아오는 존재가 아니라 아담 안에, 우리 안에 이미 내재된 존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혜사 성령은 오순절 계열 교회의 성령 충만한 목사가, 영빨이 쎈 부흥사가, 유명 기도원 원장이 주고 말고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보혜사 성령이 우리 안에 내재하고 있다는 것은 신성이 우리 안에 있다는 영지주의자들의 가르침과 모든 인간은 불성을 가진 존재라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단지 우리가 그 놀라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아담의 '에제르 케네그도'이자 '파라클레토스'인 하와는 아담의 어떤 문제를 도와주었을까요? 아담의 어떤 한계 상황을 해결해 주었을까요?

아담은 자신의 에제르 케네그도인 하와의 도움으로 죽음을 무릅쓰고 선악과를 먹을 수 있었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파라클레토스인 하와의 도움으로 하느님의 자궁이자 자신의 고향인 에덴 동산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담은 자신의 엄마인 하느님에게 버림 받을수도 있다는, 죽음과도 같은 근원적인 불안과 공포를 극복하고 온전한 존재로 성장하기 위한 전제인 하느님과의 분리와 독립을 이루어 냈습니다. 여기에 창세기의 역설과 신비가 있습니다. 창조주 하느님은 아담을 에덴동산에 가두어 두시는 존재인 동시에 아담에게 신적 조력자를 붙여 에덴동산을 탈출케하시는 존재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그 아내와 결합해 한 몸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창세기 2:24)

남자는 먼저 자기 부모를 떠나야지만 그 아내와 결합해 한 몸을 이룰 수 있습니다. 자기 엄마와 정서적으로 분화가 되지 못한 사람은 온전히 자기의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독립된 인격체가 되지 못하면 자기 자신도, 타인도 온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아담 역시 에덴동산을 탈출하고 나서야 하와와 동침할 수 있었습니다. 아담은 자신의 엄마인 하느님을 떠나고 나서야 온전히 자신의 에제르 케네그도와 한 몸을 이뤄 진짜 자기가 누구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제 2의 아담인 예수께서도 구도자의 삶을 통해, 세례 요한의 침례를 통해, 일시적인 죽음을 통해 자신 안의 진짜 자기인 에제르 케네그도를, 파라클레토스를 만나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깨달으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죽음을 무릅쓰고 모세오경의 하느님을, 유대민족의 수호신으로서의 하느님과 작별하고 율법공동체라는, 가족과 고향이라는 에덴동산을 탈출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파라클레토스와 하나 되는 삶을 통해 자신이 곧 파라클레토스가 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구할 것이니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다른 보혜사를 보내셔서 너희와 영원히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그 분은 진리의 영이시다. 세상은 그분을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기 때문에 그분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너희는 그분을 안다. 그분이 너희와 함께 계시고 또 너희 안에 계실 것이기 때문이다." ( 요한 14:16-17)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떠나고 난 뒤 아버지에게 부탁해 자신을 대신 할 다른 보혜사를, 진리의 영을 그들에게 보내주겠노라 약속하십니다. 또한 그 보혜사 성령은 제자들과 함께 하며, 그들 밖이 아니라 그들 안에 계시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러면서 예수께서는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당신을 사랑한다면 당신의 계명을 지키라고 여러차례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누군가가 만약 그 계명을 지킨다면 하느님께서 그 사람을 사랑하실 것이고, 하느님과 예수께서 그 사람 안에 들어가 살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어떤 사람을 하느님과 예수님과 더불어 삼위일체가 되게 하는 그토록 중요한 그 계명이 과연 무엇일까요?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사람이 자기 친구들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너희가 만일 내 계명을 지키면 너희는 내 친구다. (중략)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것은 이것이다.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 (요한 15:12-17)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있어 예수는 더 이상 스승도 아니고 주님도 아니고 메시아도 아닙니다. 그 사람은 하느님의 아들과, 더 나아가 하느님과 친구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의 참된 의미는, 기독교 신앙생활의 최종 목표는 구원 받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필요한 사람의 친구가 되어주고, 그 친구와 자신의 목숨이라도 내어줄 수도 있는 최고의 사랑을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예수와 친구 되어, 하느님과 예수와 한 몸 되어 영원히 서로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충만한 삶이란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친구가 될 수 없는 사람의 친구가 되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 내재된, 우리의 참 자기인 보혜사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의 최고의 계명인 서로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이시며, 친구가 필요한 사람의 진정한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파라클레토스는 '누군가를 돕기 위해 부름을 받은 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만약 예수를 사랑하여 그의 계명을 따라 누군가를 돕고자 한다면, 누군가를 사랑하고자 한다면, 누군가의 친구가 되어주고픈 간절함이 있다면 우리가 바로 파라클레토스 즉 보혜사 성령님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파라클레토스들이 모여 서로 사랑을 나누고 서로에게 참된 친구가 되어주는 삶의 현장이 바로 예수 공동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저 역시 제 안의 보혜사 성령님을 만나 누군가의 파라크레토스가 되고 싶습니다. 보혜사 예수님처럼 친구가 필요한 사람들의 진정한 친구가 되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천년전 '먹보에 술꾼이요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을 가지셨던 예수님께서 불타는 금요일 밤이면 갈릴리 세포리스 원형 극장 뒷골목 지하 할렐루야 노래방에서 소위 죄인들과 어울려 즐겨부르시던 예수님의 십팔번을 소개하며 제 글을 마치겠습니다.

https://youtu.be/hxUaOO_tRG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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