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반

'먼저된 자'와 '나중된 자'

본문

 

 

Matthew 19:30  πολλο δ σονται πρτοι σχατοι κα σχατοι πρτοι.

Many (who are are) first will be last, and (the) last (will be) first.

 

Luke 13:30  κα δο εσν σχατοι ο σονται πρτοι κα εσν πρτοι ο σονται σχατοι.

                                There are (some) last who will be first, and there are (some) first who will be last.

                                (Some) last are the ones who will be first, and (some) first are the ones who will be last.

 

말씀의 배경이 되는 이야기는 서로 다르다. 마태복음에는 부자 청년이 영생에 대한 질문을 하고,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하며 떠난다. 이어지는 가르침의 결론으로 나오는 말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과 함께, 예수님과 어울렸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라는 말씀 끝에 등장한다.

 

아무 생각 없이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된다라고 읽고/이해하고는 속으로 불편했던 적이 있었다. 교회도 먼저 나오고 봉사도 먼저하고그런데 나중된다고?

 

이렇게 마지막에 뒤집어질 운명이라면, 처음부터 열심히 노력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생각이 초기 교회 전도에서 마지막에 회개한 강도가 평생을 선교사 활동한 사람이나 교회 다닌 사람보다 낫다는 식의 얼토당토않은 논리를 내기도 했다. 마더 테레사는 죽음에 이르러 자신은 하느님에 대해 모른다는 말을 했다지 않는가? (아는 자는 말하지 않고, 말하는 자는 모르는 자다. 이런 깨달음도 있다.)

 

본문으로 돌아와, 해석해 보면

마태 19:30  많은 첫째들이 꼴찌들이 되고, 꼴찌들이 첫째들이 (된다).

누가 13:30  “(어떤) 꼴찌들은 첫째가 자들이고, (어떤) 첫째들은 꼴찌가 자들이다.

 

속된 표현을 쓰다 보니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나, 뜻은 분명하다. 첫째, 꼴찌, 처음된 , 나중된 자는 정해진 것이 아니다. 나중에 뒤바뀔 운명에 처한 것도 아니다. 끝에 봐야 안다는 논리이다.

말씀의 핵심은 현재에 안주하지 말고 깨어 정진하라는 가르침이다. 나아가, 첫째/꼴찌, 처음된 /나중된 자는 자신을 누군가와 비교하기 때문에 생기는 말이다. 자신은 오로지 자신과 비교할 . 처음(지금) 나와 나중의 ! 훨씬 마음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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