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거리, 생각할 거리

물어보면, 그 때 비로소 대답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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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어보면 그 때부터 대답하려고 했다. 한 때 우리 교인들 사이에 유행했던 말이다. 당시에는 다른 의미로 쓰였지만, 이 말이 요즘 우리들 신학하기와 관련해 다시 생각해 볼만한 표현이다.

요즘 처음 새길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교우들이 우리들의 신앙/신학을 알리고자(전도하고자) 애쓰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물론 좋은 의미로, 베푸는 선행이지만, 받는 이들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이런 법보시(法布施)가 도전을 넘어, 위협을 주기도 하는가 보다.

이럴 때 어떻게 해야할까?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는 신앙의 단계(stages of faith)를 6단계로 나눈 바 있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3단계와 4단계와의 차이인데, 이를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보면 사춘기를 거쳐 성인이 되는 단계에 해당되고, 이를 우리들 신학하기에 비추어 생각하면, 소위 말하는 전통적 신앙/신학방식 (conventional-earlier paradigm)과 새로운 신학하기(emerging paradigm)로 구분할 수도 있겠다.

이와 아울러 기억할 것은, 신앙의 단계는 건너 뛸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갑자기 성인이 될 수 없듯이, 전통적인(보수적인) 신앙생활 없이 어느날 갑자기 진보적인 신앙을 갖게 되는 것도 아니다. 기간의 차이는 있을 지언정, 그 흐름이 일정한 단계를 거쳐 전진한다는 것이다.

또 하나 기억할 것은, 현재 있는 단계에서 2단계 앞을 내다 볼 수 (혹은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맞다면/말이 된다면, 가르침(혹은 전도)에 제한이 있다는 말이 된다. 깨달을 수 없는 것을 강요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위협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4-5세 어린아이에게 산타클로스는 없다고 말함으로써 오히려 역효과를 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묻지도 않은 질문에 답하는 것도 도(道)를 지나치는가 싶다.

이와 관련해 우스개 소리 하나.

나는 누가 내게 이단이라고 하면, 조심스럽게 반박한다. 4단이라고 (and hopefully 5단).

댓글목록

foreveryoung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foreveryoung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심하게 공감이 가는 글이네요.

내가 받아 든 맛있는 음식, 좋은 소식(복음?)을

내가 사랑하는 이들에게도 꼭 전하고 싶어 

조바심을 냈었으나

결과적으로는 그들에게 소화불량과 배탈이라는

고통과 거부감만 주고 말았던 기억이 있고보니

이젠 조금씩 천천히 소화정도를 봐 가면서

조금씩 적응시키려고 노력하지요.

 

 

그런데, '비로서'가 아니고 '비로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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