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을 거리, 생각할 거리

신학생들에게 당부하는 말씀(펌)

본문

한국 신학 연구소 김 준우박사의 글을 퍼 왔습니다.
곰곰히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1. 어제 어느 학교 신대원 초청강연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내가 신학생들 앞에 설 때마다 청바지를 입고 강연을 하거나 강의를 하는 이유는 대부분의 신학생들이 교회주의와 성직자주의에 단단히 사로잡혀 있어 완전히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다. 목회자의 계급의식은 노동자여야 할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노동자 계급이라는 사실을 아무리 말로 설명해도 학생들이 감을 잘 잡지 못하기 때문에 온몸으로 증언하기 위해서이다. 특히 교육은 100년 대계라고 흔히 말은 하지만, 신학교에서는 10년 혹은 20년 후의 목회 과제와 목회현장의 변화를 염두에 두고 신학생들의 미래를 준비하도록 하지 않는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며, 현실적으로도 목회자와 신학자들이 화이트칼라이던 시대는 지났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대학원 다닐 때까지 대부분 막노동을 해보지 않은 채 책만 읽고 교회 일만 하던 신학생들은 자신들이 마땅이 노동자 계급이어야 하며, 때로는 부득이 막노동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무슨 수로 감을 잡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주님 예수는 목수였던 아니면 농부였던 간에 노동자 출신이었던 것이 분명하며, 이 땅위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노동자로서 살았다. 안수를 받은 성직자는 결코 아니었다. 감독회장 사태 역시 근본적으로 그들은 노동자들이 아니라 종교귀족들이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며, 죽어가는 교회가 다시 살아나기 위한 처절한 반성과 몸부림은커녕, 죽어가는 교회가 어떻게 예수를 배반하고 예수를 또다시 십자가에 매달고 브로커체제의 패거리의식으로 다투고 있는지를 온세상에 여실히 보여주는 해괴하고 한심한 작태인 것이다. 예수 당시에도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은 사치스런 저택들을 지어 부귀영화를 누렸지만, 시골의 가난한 제사장들은 끼니 걱정에 시달렸을 만큼 해괴하고 한심한 작태들이 벌어졌다고 팔레스타인 고고학은 증언하고 있다.

 

2. 20여 년 전에 나이 마흔에 미국 연합감리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기 전에, 나를 곤혹스럽게 만든 책은 당시 리처드 니버 세미나에서 읽었던 Social Sources of Denominationalism이었다. 예수의 종교이든 웨슬리의 감리교든, 다른 소종파들이든, 처음 시작은 가난한 사람들의, 가난한 사람들에 의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종교로 출발했지만, 두 세대 혹은 세 세대가 지나면서 중산층의 종교로 둔갑해버린 역사를 보면서, 내리게 된 결론은 분명했다. 인류 역사상 대다수 성직자들은 지배자들의 통치와 착취를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당화시켜주는 권력의 하수인으로서 기생충처럼 빌붙어 살았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성직자 계급의 일반적인 정치경제적 기능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해방신학을 공부하던 내가 안수를 받은 후, 목사가 되어 권력의 하수인으로, 지배계급의 기생충으로 전락하지 않는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에 Enrique Dussel의 남미교회사를 읽으면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정복자들의 하수인이 되어 원주민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현실주의 전통과 함께, 원주민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라스 카사스와 같은 분들의 신비주의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내려오고 있다는 사실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었다.

 

3. 이것은 목회자의 정체성, 특히 계급의식과 연관된 문제이다. 즉 목회자가 지배자들의 하수인이 되어 안락한 성직자로서 살아갈 것인지, 아니면 노동자 계급으로서 피눈물 흘리는 노동자들의 고통에 함께 아파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인지에 달려 있는 문제이다.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님처럼 안락한 의사의 길을 포기하고 아프리카 오지에서 철저하게 착취당해 가난과 전쟁, 문둥병에 시달리는 사람들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귀한 기쁨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그분의 복음 이해가 자신의 뼈저린 가난 체험에서 비롯된 계급의식과 무의식 중에 연관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분의 형님 역시도 부산에서 나환자들을 위한 사목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은 이런 점을 뒷받침하는 것이 아닐까.

 

4. 돈을 하느님으로 섬기는 시대에, 대학생들은 안전한 직장을 찾는 게 꿈이지만, 20대와 30대 합쳐서 약 1천만 명 가운데 청년실업자가 300만 명인 시대에, 신학생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주의 종"으로서 목숨을 걸겠다는 이 시대의 보석과 같은 존재들이다.

 

5. 문제는 신학생들이 대부분 목회자로서의 막중한 소명감 때문에, 특히 목사 가정이나 장로 가정에서 자라나면서 어려서부터 순종적이며, 신학교에서 길들여지고, 목회 현장에 나가 선배들에 의해, 교회 평신도 지도자들에 의해 더욱 더 철저하게 길들여지기 쉽다는 점이다. 예수의 제자라면 당연히 예수처럼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들사람 정신"으로 살아야 할 터이지만, 배짱이 있는 신학생들은 종종 목회를 접고 다른 길을 택하는 반면에, 닳고 닳아 중늙은이들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목회 현장을 인내하고 있는 경우를 많이 보게 된다. 평신도들과 달리 신학생들이 착하다는 말을 듣는 것은 칭찬이라기보다는 욕으로 들리는 이유가 이런 길들여짐이 두렵기 때문이다.

 

6. 또한 신학생 시절에 목회실습을 하게 되는 교회들, 혹은 학교 채플에서 만나게 되는 목사들은 대부분 종교 비지니스에서 성공한 큰 교회 목사들이다. 그들의 설교를 듣다 보면, 신학생들은 무의식적으로 자신도 목회를 하게 되면 저 목사처럼 큰 교회에서 목회를 할 수 있으리라고 꿈을 꾸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교인들이 사회저명인사들과 사귈 수 있는 각종 종교 비지니스를 잘 하는 대형교회에 나가지 않고 오히려 내가 개척한 교회에 나오게 되리라고 꿈꾸는 것이야말로 믿음의 만용이기 십상이지 않을까.

 

7. 신학생들의 미래는 학교도 교단본부도 그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다. 감리교회도 미자립교회가 40% 정도인데, 이제는 대학원 졸업하고 그런 미자립교회 목회 자리를 얻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또한 교회를 개척하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다고들 말한다. 기득권 추구에 여념이 없던 대형교회들이 사회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들이 개척교회에는 "쇠망치로 정수리를 내려치는 것처럼" 교회 성장에 치명적인 걸림돌이 되어 전도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8. 오늘날 미자립교회는 상당수가 큰 교회들의 선교비 지원으로 유지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10년 혹은 20년 뒤의 상황은 더이상 이런 기대가 거의 불가능할 것으로 예상된다. 왜냐하면 그동안은 농촌교회 출신 교인들이 도시교회로 이동하고, 도시교회에서 교인들이 수평이동해서 대형교회를 이루었는데, 농촌교회가 빠르게 붕괴되고 있고, 또한 도시교회에서 대형교회로 수평이동의 고리들이 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빠른 노령화, 낮은 출산율, 노동자들의 절반 가까운 비정규직 등, 미래교회에 대한 전망은 매우 어둡다.

 

9. 기성교회는 전 세계적으로 급속하게 몰락하고 있다. 특히 서구 교회들은 30년마다 교인수가 절반으로 줄어들고 있는 현실이다. 그동안 교회성장을 주도했던 오순절 교단과 침례교단의 전도 무기는 성공과 번영의 복음이었지만, 크리스탈쳐치의 파산에서 보듯이, 예수 믿으면 부자된다는 선전은 이제 더이상 통하지 않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경제가 성장할 때는 그런 선전이 먹혀들어갔지만, 경제는 위기를 겪고 있는 현실이며, 경제가 회복된다 해도 고용은 늘지 않기 때문에, 예수 아무리 잘 믿어도 부자가 되는 세상은 지나갔다. 반면에 신흥종교들은 급성장하고 있다. 월간중앙 10월호에 실린 안상홍의 하나님의 교회는 지난 10년 동안 신자가 100만 명이 증가했다고 한다. 신흥종교들의 급성장은 무엇보다도 그들의 철저한 세뇌교육 때문이다. 가톨릭이 그나마 유지되는 이유는 묵주기도를 통한 신앙의 생활화와 수녀들의 교육 때문일 것이다.

 

10. 종교시장에 대한 흥미로운 사회학적 분석이 있다. 종교시장 역시 일반 경제와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어느 교회는 성장하고 어느 교회는 몰락하는 이유는 회사들의 경쟁과 같다는 말이다. 예컨대 자동차 회사들이 경쟁할 때 그 성패는 1) 회사의 조직, 2) 세일즈맨, 3) 제품, 4) 마케팅 전략인 것처럼, 교회의 성패 역시 1) 교단의 브랜드 혹은 교회의 장정, 2) 목회자, 3) 교리 혹은 복음, 4) 전도전략에 달려 있다는 말이다. 첫째로 교단의 브랜드, 교회의 장정은 오늘날 매력은커녕 혐오감을 자아내기 십상이다. 둘째로 목회자는 자동자 세일즈맨이 그 제품에 대해 아는 것만큼 자신이 판매하는 제품에 대해 꿰뚫고 있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하며, 신학교 커리큘럼은 너무 파편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교수들은 자신들이 박사과정에서 배웠던 것들을 대부분 그냥 가르칠 따름이기 때문에, 목회를 위해서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데, 하나로 꿰어지지 않은 신학지식들은 목회에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셋째로 목회자들이 판매하는 제품으로서 가장 잘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나의 복음"이다. 즉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해서 신학적으로 정리한 my gospel인데, 현재 한국의 신학교육에서는 석사논문은 요구하지만, 자신의 신앙고백을 Credo로 정리하는 일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참고로 내가 SMU에서 공부할 때 석사학위 필수과목이었던 조직신학에서는 1년 동안 준비해서 독창적인 Credo를 쓰는 것이 요구되었다. 당장 설교를 해야 하는 목회자들을 교육시키는 데 가장 필요한 것이 바로 Credo라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넷째로, 전도전략은 보통 21세기 포스트모던 시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교회는 16세기 신학으로 전도를 하는 현실을 부인하기 어렵다.

 

11. 기독교라는 배는 전 세계적으로 급속하게 침몰하고 있으며 한국 감리교의 경우 대학원을 졸업해도 갈 교회가 없는 형편인데, 신학생들을 거의 전적으로 교회 담임 목회를 목표로 훈련시킨다는 사실은 신학생 개인으로서는 인생을 낭비하는 것이 되기 쉽고 교회적으로는 인력낭비라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어불성설이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일꾼들, 주의 종들이 해야 할 과제는 엄청나게 많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목회를 위해 부름 받은 것이며, 특히 신학생들은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를 위해 특별히 그 선봉에 서도록 부름받았다. 교회주의와 성직자주의라는 고정관념의 포로에서 해방되는 일이 시급하다. 더군다나 전 세계의 우수한 두뇌들은 이 죽임의 세계질서, Wall Street, IMF, World Bank, 제국들의 군산복합체, 석유회사, 곡물회사 등이 장악하고 있는 체제를 강화시키고 재생산하기 위해 수 만 명, 수 십만 명이 불철주야 노력하고 있다. IMF에만도 경제학 박사가 800명이 넘는다고 하지 않는가? 이런 지배체제에 맞서서 하나님의 세상을 위해 영적인 싸움을 할 용사들은 소명감에 불타는 신학생들말고 누가 있겠는가?  

 

12. 바라기는 신학생들이 다음 질문을 심각하게 생각하고 그 해답을 찾은 후에 졸업 후의 진로를 선택하면 좋겠다.

첫째, 기독교는 왜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을 죽인 종교가 되었는가? 왜 부시 대통령처럼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이 종종 매우 잔인한 사람들인가? 기독교의 복음은 왜 흑인들, 여성들, 제3세계 원주민들, 동식물들에게는 기쁜 소식이 아니었는가? 예수님이 "예수천당 불신지옥"과 같은 배타주의를 가르치신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는가?

둘째, 예수는 왜 거룩한 예루살렘 성전을 "강도들의 소굴"(막 11:17)이라고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했으며, 안식일, 제사장, 율법학자들, 율법, 특히 정결법 등 성전체제를 타파하려 했는가?

셋째. 왜 교인들로부터 존경받는 목사는 매우 드문가? 교회 세습과 감투싸움에서 보듯이 왜 목사들은 평생 설교한 십자가의 복음을 배반하는가?

넷째, 왜 예수를 따라서 예수처럼 살려고 하는 목사들은 드물고, 예수를 믿는 것으로 만족하는 목사들은 많으며 그런 목사들은 흔히 종교 비지니스에 성공하는가?

다섯째, 하나님께서 우리 시대 "주의 종"에게 원하시는 일이 도날드 메서 교수의 지적처럼 교회업무(설교, 심방, 교육, 행정)뿐인가? 하나님은 오늘의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분노하며 무슨 일로 애통해 하시는가? 빈부격차가 심하고 기후재앙이 심각한 오늘의 현실에서 십자가에 달려 신음하며 죽어가는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신학생들은 부디 이런 질문들에 대해 정직하게 대답을 찾고 졸업 후의 진로를 선택하기를 바랍니다.

 

특히 교회를 개척하더라도 건물 전세 내어 개척하는 대신에, 집이나 사무실에서 성경연구모임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지혜일 것입니다.

미국에서 1965년에 척 스미스가 시작한 갈보리 채플은 미국에 600개의 교회와 해외에 100개의 교회가 있으며, 빈야드 교회도 1971년에 켄 굴릭슨이 시작하여 1982년에 존 윔버가 이어받아 미국내 400개의 교회, 해외에 200개의 교회가 있으며, Hope Chapel은 1971년에 랄프 무어가 시작한 교회로서 미국에 50개 지교회가 있지만, 이들 모두 집에서 성경연구모임으로 시작된 교회가 성장한 것이라고 합니다. 목회자는 주중에 일을 하면서 주말에 목회를 시작했으며, 교인이 50명 이상 되었을 때 목회자가 풀 타임으로 목회를 해서 성장하게 되었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랍니다. 

김경재 교수님 증언에 따르면, 한신대는 1960년대까지도 신학생들에게 축산학이나 원예학을 가르쳐 졸업 후의 생계대책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아무런 생계대책도 없이 신학생들을 졸업시켜 세상으로 내보내기 때문에, 노부모에게서 생활비는 물론 용돈까지 타서 쓰면서도 "주의 종"이라는 자의식으로 인해 노동을 기피하는 경향이 나타나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미래는 빈부격차와 기후재앙으로 인해 이미 다르푸르 내전에서 보듯이 더욱 폭력적인 사회로 변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생태마을공동체를 세우는 일은 지역생태주의를 통해 자립경제와 영성수련공동체의 형성만이 아니라 인류 생존의 마지막 돌파구로서, 신생대가 급속하게 끝나가는 마당에 하나님께서 가장 절실히 필요로 하시는 생태대를 열어가는 사업이라고 판단합니다. 


댓글목록

Susan H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Susan H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절대 동감하는 말인데요.. 다만 이 분께서 현실적으로 어떤 사람들이 신학생이 되는가를 잘 모르시는 거 아닌가 싶은것이...
한국에서 보이는 대다수의 신학생들은 사회의식, 사회적 소명같은것에는 관심조차 없고 아마 성적에 대충 맞춰서 신학교에 갔거나
그들 자신이 근본주의 기복신앙에 물들어 있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요?
==> 이런 지배체제에 맞서서 하나님의 세상을 위해 영적인 싸움을 할 용사들은 소명감에 불타는 신학생들말고 누가 있겠는가?  
아마 이런 사람들은 애초에 신학교에 가기보다 학생운동에 뛰어들거나 정치에 가담할 거 같네요.
2세들을 포함, 제가 본 신학생들은 체제에 순종하고 제도권에 편입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선하던 악하던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니 절대 따라야 한다나 뭐라나 하면서...
또 기존교회들은 이 땅의 모든 고난은  내세에서 응답받으니 그냥 권위에 순종하고 참아야 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까. 그렇게해서 종교는 권력과 영합하구요. 한국에서 젊은이들 모이기로 유명한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도 세속적 성공을 강조하던 목회자였습니다. 사회개혁 의식이 있는 교회에 젊은이들이 더 모인다는 말은 못 들어본 거 같아요.

먼저 사회적 소명과 책임을 다하는 신앙관이  일반대중에게 알려지고 나서야 이 분이 원하시는 수준의 신학생들이 나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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