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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다한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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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과 생각

[요즘 이상하게 말이 많아졌다. 17-8분이면 끝내던 설교가 이제는 20분을 넘어 24분에 이른다. 그런대도 못다한 말이 있다니. 나이가 드는 것일까? ㅋㅋㅋ]

우리들—더 넓게는, 사람들—삶 속에 빠질 수 없는 것이 소통(communication)이다. 그 소통의 매개체가 말이고, 그 이전에 말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이 생각이다. 이를 좀 점잖게 말하면, 문학과 철학이라고 할 수도 있고,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성서와 신학으로 발전시킬 수 있겠다.

말(언어) 만큼 골치 아픈 것이 또 있을까? 생각(뜻)을 전달해야할 매개체(말, 언어)가 문화와 이해의 차이 때문에 종종 소통의 걸림돌이 되곤 한다. 그래서 우리가 아무 생각없이 쓰는 말(언어)을 늘 되집어 보고, 새롭게 정의할 필요가 있다. 소통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 사이에 공공의 (합의가 된) 정의/이해가 필요한 이유다.

특별히 성서 언어는 늘 새로운 정의를 필요로 한다. 사회적 환경, 문화적 유산이 다르기 때문이다. 성서언어가 담고 있는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receptor language)로 바꾸는 작업이 필요하다. 설교자의 첫 번째 임무가 바로 성서언어를 오늘의 언어로 바꾸는 작업이다. 마치 한글을 영어로, 혹은 영어를 한글로 번역하는 것처럼 두 언어에 익숙지 않고는 함부로 번역을 해서는 안된다. 글로 쓰인,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은 주워 담을 수 없기 때문이다.

성서는 오늘의 말로 번역되기까지는 죽은 말이다. 이 죽은 말—바울이 말하는 문자로 쓰인 말—에 생명을 불어 넣어 살아있는 말로 만드는 작업이 번역자/설교자의 역할이 아닐까?

오늘 본문의 마지막 구절, 눅 20:38 πάντες γὰρ αὐτῷ ζῶσιν. (for all are living in relation to him), "모든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있다”(표준새번역). 보기 드물게 탁월한 번역이다. 부활(ἀνάστασις)을 비교종적으로, 비기독교적으로 설명하는데 꼭 필요한 구절이다. 말은 생각을 담고, 생각은 말을 넘어 선다. 문학은 철학을 담고, 신학은 성서를 넘어선다. 기독교는 종교를 넘어, 온 인류의 삶을 풍요롭게 할 때, 비로소 그 존재 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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