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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성서의 역사와 미래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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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Story신약성서의 역사와 미래 전망2010/01/11 09:51 | Posted by desertgardener

Robert Funk는 예수의 비유 연구에 정통한 신약 학자이며, 많은 논쟁을 불러 일으킨 Jesus Seminar를 John Dominic Crossan과 공동으로 1985년에 만들고 주도했던 사람이다.

이 글은 매우 급진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며, 펑크의 글쓰기 스타일이 이해하기 쉽지 않고 번역의 미숙함까지 겹쳐, 읽기에 부담스러운 글이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형성 과정과 그 미래에 대한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읽어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신약성서: 그 과거와 미래

(The Once and Future New Testament)

로버트 펑크

조성철 역

 

 

크리스천들의 사고 의식 속으로 정경이 다시 들어오게 된 데는 두 가지 요인이 있다. 첫 번째로는 성경에 대한 역사적 비평 연구가 발전함에 따라 정경의 주장들이 끊임없이 허물어져 갔다는 점이다. 두 번째 요인은 기독교 복음과 신조들에 대한 고대의 신화적 준거 틀(frame of reference)이 무너졌다는 점이다. 먼저 정경이 형성되는 과정을, 그리고 정경이 계속적으로 신학과 종교에서 담당하는 역할을 학자들이 다시 생각해 보게 된 것은 이들 요소 때문이었다.

두 번째 부분에서, 우리는 정경의 권위가 무너지는 데 기여한 여러 요소들을 살펴볼 것이다. 정경의 권한이 쇠퇴하는데 공헌한 힘들은 어쩌면 예수 세미나의 보고서들에서 시작되었다 할 수 있다. 그 보고서들 속에 나타난 역사적 예수의 모습은 중요한 사항들에서 교리들의 정통적 그림과는 서로 같지 않았다. 이와 같은 차이에서 정경의 권위에 위기가 발생하게 되었다: 4복음서가 제공하는 예수의 그림을 우리는 계속 답습할 것인가, 아니면 역사적 연구가 찾아낸 것들에 귀 기우릴 것인가?

이런 위기는 정경 특히 신약을 개정하려는 여러 제안들을 낳게 되었다. 세 번째 부분에서 나는 정경의 새로운 개념을 제시하며 아울러 한 개 이상의 신약성서를 발행하자는 제안을 하려고 한다.

 

1. 정경 발전의 과정(The Process of Canon Development)

 

경전들을 모아 정경으로 만들고 인증하는 것은 아주 일찍 시작되었지만 아직도 끝나지 않은 과정이다. 여기에서는 이 복잡한 과정의 몇 요소들을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A. 유대 경전들(Jewish Scriptures)

 

예수운동은 아주 초기에는 "경전들"-주로 예언서와 잠언들-을 찾기 시작하였으며 이는 예수가 곧 기다리던 메시아이며 옛 예언들을 이루었다는 것을 증명하기위한 것이었다. 크리스천 기록자들이 얼마만큼이나 광범위하게 그들에게 이용 가능했던 고대 문서들을 섭렵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들이 뒤졌던 텍스트들은 현재의 구약의 어느 형식과도 연관성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그들이 찾았던 경전들은 히브리 성경 자체가 아니라 히브리 성경의 희랍어 번역(70인 역)이었다. 대부분의 그 책들의 원어는 히브리어라는 것을 현대 학자들은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크리스천 "구약"의 번역을 준비하는데 경솔하게도 희랍어를 히브리 텍스트로 대체해 버렸다. 그래서 대부분의 현대 교회들의 정경은 예수와 그 제자들의 경우와는 달리 다른 언어로 된 다른 종류의 텍스트를 갖게 되었다. 우리들은 편리하기만 하다면 정경에 관한 역사적 사실들을 무시해버릴 만반의 태세를 갖춘 듯싶다.

문제를 보다 명확히 해보자. 크리스천 운동은 자신들의 것도 아닌, 제이의 언어로 된 일련의 경전들을 훔쳐 가지고는 자기들의 주장들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그 "정경"안에 있는 증거 자료들(proof texts)로 이루어진 하나의 "정경"을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과정의 역사적 관점에서 그리고 여러 세기에 걸친 기독교-유대교의 관계라는 관점에서, 이제 우리는 본래 그들의 성경인 히브리 성경을 유대인들에게 돌려주고, 우리들은 역사적으로 초대 기독교인들이 사용했던 성경들에 우리 자신들을 국한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기독교의 발생 "배경" 역할을 할 고대 문서들을 수집할 필요가 있다면, 우리는 희랍어 구약(70인 역)을 다시 채택하여 영어로 번역하여 우리의 "첫 번째 언약(First Testament)"으로 삼아야 한다.

 

B. 서신들: 특수성(Letters: Particularity)

 

유대교와 이방 종교에 대하여 크리스천들이 자신들이 누구인가를 말하며, 그들의 일상생활과 교회생활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다루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서로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다. 교회 경전의 중요한 서신들을 모아놓은 것이 바울 서신이다. 바울 자신이 쓴 서신들은 특수한 문제들에 관해서 별도의 교회들 앞으로 쓰인 것들이다. 이와 연관해서 생기는 질문은 이렇다. 1세기 초에 살았던 크리스천들의 특수한 문제들에 대해 다소에 살았던 바울이 제시한 특수한 해결책들이 모든 시대의 크리스천들에게 적용되는 것인가? 그 문제에 거의 모든 신학자들이 주는 답은 부정적인 것이다. 그들이 말하는 바로는 바울의 대답은 그의 시대와 장소 그리고 그의 비전의 범위와 순수성과 관련 있는 상대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바뀜에 따라 바울이 제시한 대답은 몇몇 중요한 점에서 수정되어야만 한다.

그뿐만 아니라 바울 서신들 안에는 서로 맞서고 있는 여러 가지 목소리들이 있다. 즉 바울은 언제나 같은 소리를 내고 있지 않다. 그의 다양한 관점들에 대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 것인가? 이 문제로 인해 여러 학자들은 많은 목소리들의 합창 가운데서 바울의 참 목소리를 발견하려고-정경 속의 정경을 발견하려고-시도하게 되었다.

서신들의 “정경화 작업”은 따라서 아직도 계속되는 과정으로, 서신들이 대변하려던 "규범이 되는(normative)" 증언을 찾아서 표명하고, 그 증언을 새롭게 변화된 환경에 적응시키려는 노력이다.

 

C. 복음서들: 다양성(Gospels: Plurality)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복음서들은 여러 단계를 거쳐 만들어졌다. 가장 먼저 된 이야기 복음(narrative gospels)인 마가복음은 아마도 한번 이상의 편집을 거친 것이다. 마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기초가 되는데, 이 두 복음서는 마가복음과 말씀복음 Q(Sayings Gospel Q)를 합해서 만들었다. 만약 당신이 이 이론을 좋아하지 않으면 마가복음은 마태복음의 축소판일지 모르며 누가복음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을 하나로 묶어 만든 것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소수 신약학자들이 주장하는 두 복음설(the two-gospel theory)이다. 아무튼 공관 전승은 한 저자가 보다 앞서 만들어진 작품을 이용해 새로운 복음서들을 창작하는 단계를 거쳐 이루어진 것이다.

제 4복음서 또한 편집 과정을 겪은 것이다. 21장은 원래 20장으로 끝나는 먼저 사본에 추가된 것이다. 여러 학자들이 이론을 제기하는 바로는 지금 이적 복음(Signs Gospel)이라 부르는 요한복음의 초기 판이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학자들은 요한은 마가복음과 함께 기적 자료(a miracle source)를 공유했으며, 이 자료를 마가와 요한은 그들 나름대로 편집했다고 주장한다. 요한복음은 세 번이나 네 번, 어쩌면 그 이상 편집된 것이 틀림없다.

기록된 복음서들 뒤에는 20여년 또는 그 이상 기간의 구전 전승이 자리 잡고 있다. 초기 이야기꾼들은 그들이 기억할 수 있는 예수의 말씀들을 되풀이 하였으며 그에 관한 일화들을 말하였다. 이러한 일화들은 당시의 모든 이야기꾼들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 형식인 선포 이야기, 귀신 축출, 치유, 소생, 부름 그리고 전도(사명) 이야기, 자연 기적, 전설과 신화의 형식을 취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말로 만들어지고 전해졌기 때문에 그 내용은 이야기하기에 따라 다양하게 된다. 민담으로서 대부분의 민간전승은 오랜 세월에 걸쳐 무수히 그 내용을 편집하고, 삭제하고, 늘리기도 하며 뒤섞기도 하는 기억의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설사 실제로 존재했었다 하더라도, 구전 이야기들은 그들의 현재 형태 안에서는 (직접)목격자들로부터 전해진 것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마가복음의 저자가 최초의 이야기복음을 쓰려고 마음먹었을 때 저자는 구전전승으로부터 말씀들과 일화들을 수집하여 그 사건들의 실제 순서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이 하나의 연속적인 이야기로 그들을 배열하였다. 마가가 이야기 부류, 형식 또는 내용, 때로는 각각 따로 존재했던 말씀들을 하나로 묶는 표어들(catchwords)을 채용하는 방법으로 일화들과 말씀들을 끼리끼리 모은(group) 것을 보면 이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 이야기를 보다 응집력 있게 만들기 위해 저자는 이야기에 뼈대되는 사건들(framing events) -시작사건으로서 세례 요한과 예수의 세례, 전환점으로서 영광스런 변모와 수난 예고, 클라이맥스로서 수난과 빈 무덤 이야기-을 설정한다. 어떻게 예수의 세례 장면에서 하느님의 아들임이 확인되었고 또 어떻게 음모가 꾸며지고 그가 죽게 되었는지를 말하는 이 이야기 틀(narrative frame)이 바로 나중에 사도신경을 탄생시키는 밑그림이 되었다.

신약성경에는 네 개의 복음서가 있다. 왜 네 개인가? 세상에는 네 개의 바람과 네 개의 방향이 있기 때문에 4 복음서가 있다는 이레네우스(Irenaeus)의 추측은 얼토당토않으며 우습기 짝이 없다. 유죄 판결을 내리는 데는 적어도 두 사람의 증언이 있어야 한다는 기본적 요구 사항을 충족시키기에는 한 사람의 증언으로는 만족스럽지 않다는 설명이 보다 그럴듯하지 않은가. 실제로 신약에는 두 증언-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있다. 어떻든 복음서들은 전승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있다. 특수성과 함께 다양성은 경전 저술의 권위에 하나의 문제가 되었다. 그 문제를 둘러싸고 있는 방식은 네 개의 이야기들이 하나로 통합되는 조화를 이루는 복음(a gospel harmony)을 낳게 된다. 사도신경은 그 이야기를 요약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D. 신약의 일관성(Unity of the New Testament)

 

역사비평은 신약의 일관성에 의문을 제기해왔다. 이제는 신약을 한 무리의 목소리(a babel of voices)로 보게 되었다. 학자들은 하나의 문서와 또 다른 문서를 차별화시키고, 저술의 본문으로부터 끼워 넣은 것(interpolations)을 가려내고, 편집자가 앞선 자료들을 어떻게 사용했는지 등과 같은 문제들을 전문적으로 다룬다.

이런 딜레마 속에는 어떤 아이러니가 있다. 한 전승이 특수한 것이 아니고 다수이라면 그것은 역사적이 아닐 수가 있다. 기독교 역사에서 신조들을 하나의 변칙(an anomaly)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것이니, 곧 신조들은 그것들이 만들어졌던 시대와 장소에 관계없이 그 유효성이 보편적인 것처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신조들을 비역사적인 것으로 만든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작품들을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크리스천 신앙과 실천의 권위적인 지침으로 간주하는 것은 신약으로부터 그 특수성과 다양성, 나아가 그 역사성을 빼앗는 것이다. 전통적인 신약성경을 계속 사용하면서 정경으로 여기는 것은 세월이 바뀌는 것과 성경과는 서로 아무런 상관성도 없이 가고 있다고 단정 짓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간단하게 다루려 한다.

 

E. 구전과 기록으로서의 전승(Tradition as Oral and Written)

 

널리 알려진 바와는 달리, 크리스천 운동은 그 시작에서부터 책의 종교(a religion of the book)는 아니었다. 사실상 그것은 영의 운동(a movement of the spirit)이었다. 예수는 율법과 예언서들 그리고 그 당시의 종교적 실천들에 대항하여 그의 자유를 주창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아모스 와일더가 말했던 것처럼 예수는 긴박함(immediacy), 뚜렷함(directness)과 자연스러움(spontaneity)을 가지고 말을 하였다. 그는 율법을 꼼꼼히 주석하거나 정결 지침을 엄격히 해석하는 일에 서기관이나 정결학파(purity party)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 그는 입으로 하는 말(the oral word)을 훨씬, 어쩌면 유일하다고 할 정도로, 선호하였다.

기록하기를 꺼려함은 초기 운동에서 2세기에 까지 이어지고 있다. 비록 바울은 그의 교회들에게 편지를 썼지만 그는 직접 그들에게 가서 자신의 권위를 보이겠다고 여러 편지에서 약속하였다. 기원 후 2세기 중반까지 여러 명의 교부들이 구전전승을 기록보다 선호했다는 것이 자주 지적되어 왔다.

그러나 신약 저자들은 기록전승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기록으로 돌아서는 것은 안정적이고(stable), 결정화된(crystallized) 명확한(definitive) 무엇, 쉽게 가질 수 있고 넘겨줄 수 있는 그 무엇을 창조하려는 경향과 맞물려있다. 정경이라는 그 개념 자체가 바로 기록된 전승을 전제로 하고 있다. 구전에서 기록에로의 전환은 영의 자유스러운 표현으로부터 제도 안에서 감독들의 통제된 표현으로 옮겨가는 것과 맞물려있다. 그것은 하느님 말(word of God)에서 하느님에 대한 말(word about God)로의 전환을 표시한다. 게르하트 에벨링(Gerhard Ebeling)이 이미 말했듯이 하느님에 대한 말은 사람의 말이다. 오직 하느님으로부터의 말만이 신적인 말(divine word)이다. 맥도날드(Lee MacDonald)가 고정된 정경은 영의 들어옴(the intrusion of the spirit)에 제한을 가하는 것이라고 한 말은 정말로 타당한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정경성(canonicity)의 기준으로서 정경이라는 말이 고대 교회에서 어떻게 쓰였는지를 이해해야만 한다. 사용 기준은 어떻게 감독들이 그들의 전승을 이해하기 시작하였는지를 우리에게 잘 말해주고 있다. 즉 만약 그 전승이 대중의 영역으로 넘어가서 보통 교인(the average communicant)의 의견으로 간주될 수 있다면 그것은 정경적인 것이다. 그것은 전승이 이제는 평준화되고 그저 그렇게 되어 보통 신자들도 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사실상 정경화는 전승의 관료화, 정치화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정경화과정은 그 자체로 전승을 그저 그렇게 만들고 결정화시키는(flatten and crystallize) 역할을 한다. 그 때문에 제도 교회는 기록된 텍스트를 해석하는 권한을 고집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기록된 것의 개정 가능성을 열어둔다. 그러나 제도(교회)는 이상한 해석 행위를 규칙으로 승인할 뜻이 없었다. 즉 나사렛 예수는 그의 생전에 정결당원들에게서 환영받지 못했던 것보다도 교부들에게서 더 환영받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그 가능성이라는 것은 정경을 어떤 경직되고 법률적이며 문자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우리에게 경고해주고 있는 셈이다.

 

F. "사도적"인 정경 저작들(The Canonical Writings as "Apostolic")

 

초대 교부들은 정경의 저작들이 "사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이 사도들은 역사적 예수의 처음 추종자들이거나 그 추종자들의 필기자들/비서들(amanuenses)로 여겨지는 사람들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주장이 전부는 아닐지라도, 그 대부분의 주장은 부정확한 것임을 현재의 우리들은 알고 있다. 이것은 전승이 역사적으로 믿을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된 또 다른 점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도성의 주장은 사실상 계승을 합법화시키고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을 대변하는 권위를 뒤늦게 주장하게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와 똑같은 결함은 신약 문헌은 오래된 예로부터의 것으로 전승의 형성단계의 것이지, 제도적이고 고착되는 단계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에도 적용된다. 신약의 대부분은 1세기 말이나 2세기 초까지는 쓰여 지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이 보고하는 것들은 종종 모방한 것이고 역사적으로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는 것이다. 공의회들은 그들이 정경으로 만든 문헌들의 연대에 대해 그들이 취한 주장을 만들어 내는 과오를 범했다.

 

G. 정통과 영감으로 된 것으로서의 정경(The Canon as Orthodox and Inspired)

 

신약 문헌들이 정통적이며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같은 것을 말하는 셈이다. 어떤 책이 정통적인 것이라면 영감으로 된 것으로 여겨지고, 영감으로 된 것이라면 정통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전략적인 계획에서 이 두 개의 기준을 적용하는 것이다. 주교들(bishops)이 정통적이라고 결정한 것은 정경에 맞는 것이라고 규정함과 동시에 그것은 영감으로 된 것이라고 선포한다. 그러면서 정통적 틀에 맞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없애버리고 난공불락의 원을 그려놓는 전략이다.

초기 크리스천 운동의 정경은 전승과 해석의 전시무대(spectrum)이다. 문제는 고대 공의회와 주교들이 그 무대를 너무 좁혀 놓지 않았는가하는 점이다. 그들이 아낌없이 넓혀놓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읽을 수 있는 추천 목록에 너무 한쪽으로만 치우쳐 모은 것은 아닌 여러 종류의 문헌들을 포함시켜 놓을 만큼 그들은 현명했다. 이단-(주목 :그들 자신의 권위와 권력)-에 대해 그들은 잘 훈련받아서 그 스펙트럼을 수평적으로 뿐만 아니라 수직적으로 지나치게 좁혀놓고 말았다. 수평적 차원에서 그들이 정통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데에서 기억과 해석을 두루 대변하는 스펙트럼을 포함시키는데 실패하였다. 결과적으로 전승이 너무 밀착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어 새로운 상황과 문제에 바로 대응할 수 없게 되었다. 수직적 차원에서는 전승이 초기에 그 뿌리로부터 잘려나가 버렸다. 예수의 비전은 해석의 덮어씌움에 의해 가려졌고 바울의 진짜 목소리는 바울 모방자들에 의해 질식되어 버렸다. 불행하게도 이런 결함들은 초기 문헌들의 상당수가 파괴되어서 완전히 고쳐질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나 쪼가리 문헌과 새로 발견된 문헌들을 활용하여 새로운 정경 또는 여러 개의 정경들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그 결함을 고치는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

 

H. 정경의 언어들(Canonical Languages)

 

 16세기 자신의 경전을 정경화할 때 -정확히 1546년 4월 8일- 로마 가톨릭 교회는 라틴 불게이트(Latin Vulgate)를 정경으로 삼았다. 따라서 가톨릭의 정경 복음서들은 제롬(Jerome)과 다른 사람들의 라틴어 번역들이다. 제 4복음서에서 라틴 텍스트는 간음 현장에서 잡힌 여인(통상 7:53-8:11)의 짧은 이야기를 포함시켰다. 그 결과 가톨릭 학자들의 요한복음 주석은 그 이야기에 대해 언급해야만 한다. 헬라어 텍스트를 정경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개신교 학자들은 그들의 주석에서 그 이야기를 빼버리는데, 그들 생각에는 요한의 원래 텍스트에 그 부분은 속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정경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작은 예가 된다.

내가 아는 바로는 이제까지 헬라어 텍스트로 된 신약을 정경으로 한 적은 없다. 미국 성서공회는 네슬-알란트 판(Nestle-Aland version)의 판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정경화 하지는 않았다. 개신교와 가톨릭 학자들 모두 새로운 네슬-알란트 헬라어판 신약이 나오면 사서 그것을 진짜 신약인 것처럼 사용하고 있다. 7만개 이상의 중요한 변형이 수록된 네슬-알란트 헬라어 신약의 어느 판을 정경이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아무도 감히 그렇게 말한 사람이 아직까지 없다.

초기 예수운동은 율법서, 선지서와 시편의 헬라어 번역만을 거의 사용했다. 그렇다면 크리스천들은 헬라어 경전들을 그들의 정경으로 삼아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아는 바로는 복음서들의 원래 언어는 헬라어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우리 동료들은 예수가 아람어만으로 말했다고 생각한다. 만약 우리가 아람어로 된 예수의 가르침의 텍스트를 발견한다면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헬라어 신약 헬라어 번역을 그것으로 대체시킬 것인가? 왜 진짜 복음서로서 헬라어에서 아람어로 되돌려 번역하려고 하지 않는가? 비유로 콥틱(Coptic-고대이집트 언어의 최종형태로 헬라어 알파벳 24자에 고대이집트 민중문자 7자를 사용했으며, 많은 초기 기독교문서들이 콥틱어로 쓰이거나 번역되었다-편집부)에서 헬라어로 되돌려 번역한 것이 도마복음의 초기판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가? 온갖 종류의 흥미를 자아내는 질문들이 정경의 언어라는 문제 주위에 가득하게 있다.

 

2. 잠식당하는 정경의 권위(The Erosion of Canonical Authority)

 

성서학 연구를 포함한 과학적이며 역사적인 연구는 교회의 신조들에 나타난 전승적 주장들의 권위를 잠식해왔다. 이러한 상황전개는 전통적으로 이해되어온대로 성서의 정경적 권위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A. 역사비평 연구와 정경(Historical-Critical Scholarship and the Canon)

 

역사비평 연구의 진전은 전통적인 성서적 정경의 역사적 신뢰성과 신학적 의존성의 토대를 흔들어 놓았다. 새로운 역사적 예수 탐구는 정경의 문제를 위기의 수준에까지 이르게 하였다. 신앙의 원저자인 나사렛 예수를 그에 대한 정경의 대변(representations)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더욱 그렇게 되었다. 이 문제들과 관련지어 무슨 말을 하든 분명한 것은 역사적 존재와 정경의 그림들 사이의 거리는 줄어들었다기보다는 더 벌어지고 말았다. 예수 세미나를 열렬히 비판하는 사람들은 정통을 수호하는 것이 바로 복음서의 역사적 신빙성(trustworthiness)을 수호하는 것이며 크리스천 기원을 재구성하는데 정경 이외의 복음들을 이용하는 것에 대한 공격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였다. 우리가 당면한 위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정경과 신조에 들어있는 "성도들에게 단 한번 주어진(once for all delivered to the saints)" 것으로 믿는 신앙의 해석(version)이다. 이 문제는 아주 중요한 것이어서 나중에 다시 그 문제로 돌아갈 것이다.

 

B. 다윈과 창조 이야기(Darwin and the Creation Story)

 

다윈의 종의 기원(1859)은 근대에 들어서 정경의 신뢰성에 대한 첫 번째 전면 공격의 선봉이 되었다. 창조 이야기는 한 세기 이상 논쟁의 초점이었다. 그 논쟁의 역사는 정경의 전통적 관점을 지키려는 노력이 얼마나 끈질긴 것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 역사는 보수적 주석자들이 창세기 이야기로부터 결국은 어쩔 수 없이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음을 또한 잘 보여주고 있다. 만약 오늘에도 먹혀들어가는 창조 이야기가 있다면, 그것은 빅뱅이론이다. 빅뱅이론은 창조이야기만큼이나 신화적인 것이다. 그 가치는 이천 여 년 전에 성경 저자들이 우주에 대해 알았던 것들과는 달리, 오늘날 우리가 우주에 대해 알고 있는 것들과 빅뱅이론이 서로 어울린다는 점이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창세기 이야기는 옛날 세계관으로 점철된 고대 신화라는 것에 비해 적어도 빅뱅이론은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다는 점이다.

 

C.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Einstein's Theory of Relativity)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정경에 대한 두 번째 주요 공격으로 떠올랐다. 그 이론은 과학과 철학, 나아가 신학학계까지 흔들어 놓았다. 그러나 보수적 신학자들은 "계시된 진리(revealed truth)"와 성경적 권위에 대한 전통적 개념들에 대해 그 이론이 의미하는 바를 무시하는 임무를 떠맡았다. 돈 큐핏이 말한 바와 같이 교회가 하느님, 성육신, 삼위일체와 정경에 관한 전통적 주장들의 박물관이 되고 만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따라서 그러한 교회들을 대변하는 신학자들은 박물관 관리자가 되었다. 전통적 주장들을 둘러싸고 있는 원천적 질문들(root questions)을 공개적으로 정직하게 다루기위해서 신학자들은 교회의 관할구역을 벗어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관점의 상대성은 정통적 전승의 시각을 최종적인 것으로 고집하는 한 계속해서 그것을 따라다니게 될 것이다.

 

D. 옛날의 상징적 우주관의 몰락(The Collapse of the Old Symbolic Universe)

 

20세기 후반 정통성과 정경에 반기를 드는 또 다른 폭풍이 몰려왔다. 복잡한 발달과정의 결과의 하나로, 정통 신화를 태동하는 기반(matrix)이었던 상징적 우주가 갑자기 옹호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것은 간단히 붕괴되어버려 신조적, 정통적 신앙의 기반은 금이 가고 말았다. 신화적 기반이 폐허에 놓이면서 정통적 신조가 예수 전승의 적법한 표현인지의 질문이 토론의 대상이 되었다.

신화적 기반의 무너짐이라는 말을 통해, 정통적 신조의 기반 역할을 맡았던 신화가 이제는 사라져가고 있는 세계관과 하나로 묶여있는 것임을 나는 의미하고 있다. 그 신화는 다른 세상으로부터 내려왔으며, 기적적인 탄생으로 그 신분이 확인되고, 기적들을 수행하고는 인류의 죄악을 없애버리려고 십자가에서 죽은 구속자의 이야기이다. 그가 죽은 후에는 그의 시체는 소생하였고, 하늘로 올라가서는 다시 내려왔다. 언젠가는 예수가 다시 와서 이 세상을 우주적으로 심판하는 자리에 앉을 것이라는 약속으로 그 이야기는 끝나고 있다.

뼈대가 되는 세계관의 신빙성이 없어지는 것은 신조적 이야기의 요소들이 남은 것이 하나도 없게 될 때까지 하나씩 하나씩 벗겨졌음을 의미한다. 더 이상 믿을 데라고는 없는 신조와 그 결과로 생긴 도저히 믿기 힘든 예수가 우리에게 남아 있다.

더 이상 우리는 예수가 남성의 정자 없이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고 믿지 않는다. 더 이상 우리는 그가 문자 그대로 물 위를 걸어가고 폭풍을 잠잠하게 하는 기적을 일으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더 이상 우리는 그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마태에 의하면 여자와 아이들을 포함시키지 않고)을 먹였다고 믿지 않는다. 이미 우리는 그의 첫 번째 부활은 슬픔으로 야기된 분명한 환영(luminous apparitions)이었음을 상당히 확신한다. 빈 무덤 이야기들은 육체적 부활을 증명하려는 후대가 꾸며낸/소설적 시도이었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승천은 하나의 소설로만 가능하다. 아담의 원죄 때문에 생긴 인류의 죄악을 속죄하기 위하여 예수가 죽었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한다. 예수는 새로운 종교를 세우고, 사제를 임명하고, 독신제도를 도입하려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다. 요약한다면 어떤 정통적 이야기도 공격에 견디고 남을 것은 없다.

텔레비전 전도자들이나 근본주의자들, 그리고 많은 복음주의자들의 핵심적 도그마들-예수의 신성, 동정녀 탄생, 피의 속죄, 육체적 부활과 재림-은 박물관 전시물들이다. 옛날의 상징적 우주관은 속속들이 썩어버려 많은 신자들은 더 이상 흥미를 느끼지 못하여 그런 도그마들을 토론하려고 하지 않는다.

 

E. 종이 교황의 사망(The Demise of the Paper Pope)

 

많은 사람들에게 성경은 아직도 종이 교황 노릇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에게 성경은 로마 (가톨릭) 교회의 절대로 틀릴 수 없는 교도권(magisterium)과 같다. 그 어느 것도 한 때는 그랬었던 것처럼 없어서는 안 될 진리의 샘으로 간주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리스천 공동체 곳곳에서 자기들이 선택한 여러 가지 관례들과 신앙을 인가하기 위해 성경을 선별적으로 불러내어 주문을 외우고 있다. 성경이 아주 제한적인 정도로만 권위를 갖는다는 것은 바로 권위로서의 성경이 침식당하고 있는 정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대중들에게 성경의 신성함이 이제껏 보호되어 온 것은 고도의 무식함(a high level of illiteracy) 때문이었다. 여러 가지 조사에서 나타난 바로는 성경은 하느님의 말이라고 주장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사실은 성경의 내용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이라고 자기들의 믿음을 선언하는 사람들의 절반 이상은 4복음서의 이름을 제대로 대지 못한다. 우리들 가운데 아무도 지지하기는커녕 기꺼이 참고 견디려 하지도 않는 주장들과 기준들(causes and standards)을 성경과 기독교의 전통적 형식들은 아직도 여전히 지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우리가 잊고 있는 사실은 최근 17세기 까지 뉴잉글랜드의 청교도들에게 성경은 마녀들을 사형에 처하는 권위이었다는 점이다. 북미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마녀 처형은 1647년 마사추세츠에서 일어났다. 그 질병은 1692년에 다시 발생하여 대부분이 여자들인 19명이 마녀로서 처형되었다. 유럽에서는 1231년 그레고리 9세에 의해 시작된 마녀사냥이라는 이름으로 수천 명의 여자들이 처형되었다. 이러한 대학살은 출애굽기에 기록된 것으로 정당화 되었다(22:18;신 18:10;cf.갈 5:20): "너희들은 마녀를 살려두어서는 안 된다." 마녀들의 처형은 18세기 말까지 끝나지 않았으며, 그것도 겨우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끝났다.

서신들의 학자용 판본을 만들면서 나는 다시 한 번 골로새서 3:22에 있는 명령에 전율을 느꼈다. "종으로 있는 이 여러분, 모든 일에 육신의 주인에게 복종하십시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성실한 마음으로 하십시오."

이 명령은 하느님의 뜻이라고 언급되어 있는 에베소서 6장 5절, 그리고 노예들은 하느님의 인정을 받기위해서 참을성 있게 매를 견디라고 이르는 디모데전서 6:1-2, 디도서 2:9-10, 베드로전서 2:18-21에 이런 생각이 되풀이되고 있다. 토라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서로를 종으로 삼을 수 없고, 다만 그 땅에 외국인이거나 이방인일 때에만 남녀 종으로 삼을 것이 허락되었다. 그런 종들은 다른 상품들과 같이 전수될 수 있는 재산으로 간주되었다(레 25:44-46).

그렇다면 디모데전서에서 보게 되는 여성의 위치에 관한 매력적인 묘사는 무엇이란 말인가? 여성은 침묵 속에서 완전한 복종을 배워라. 나는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거나 남자 위에 권위를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들은 잠잠할지니라. 아담이 먼저, 그 다음 이브가 창조되었음을 상기하라. 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다. 반대로 속은 것은 여성이며 그 죄에 대한 책임은 이브에게 있다. 저들이 모든 겸손함으로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 안에 살면서 아이를 가지는데 여성들의 구원은 있다(딤전 2:11-15). 엡 5:22, 골 3:18, 딛 2:5, 벧전 3:1에서 그들의 남편들에게 복종하도록 여성들에게 명령되었는데, 남 침례교가 여성을 인간 사회에서 제 2위의 역할에 떨어뜨리는 그들의 공식 견해를 채택한 것은 이 구절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러한 특수한 상황은 이방인들을, 때때로는 야웨 자신이 직접 돕기도 하여, 전쟁에서 칼끝에 두는 부족 규칙에 비추어 보면 아무 것도 아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였다는 믿음으로 저들을 박해하였던 것을 생각해보라. 성에 대한 편견의 책임이 성경보다는 교부들에게 더 많이 있지만, 성과 성적 경향, 여성과 동성애에 대한 억압이 성경에 있다. 남성 우월적이고, 중세의 사고방식에 젖어 자기 잇속만 챙기는 성직자들의 완고함에 대해 성경이 책임져야할 일은 아니다. 우리들 남성들이 이처럼 나쁜 짓을 저질렀다. 여러 성경 저자들에 의해 전제된 가부장제를 채택함으로 남성들은 그것을 정당화 하였다.

성경적 믿음이 우리를 배반했다. 성경을 믿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 귀 기울였다. 그리고 성경은 우리의 보다 나은 판단을 배반하였는데, 우리의 판단들은 이제 궐기하여 거룩한 항의를 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성경적 믿음이 아직도 살아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대체로 성경의 내용을 모르고 있으며 그 역사와 형성과정에 대해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한심한 사태에 그나마 긍정적인 면은 성경의 권위가 급속도로 깎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정경은 그 정경의 옷이 벗겨지고 있다. 그것을 아쉬워하는 향수가 남아 있는데 성경에 있는 사악함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품고 있는 심오한 통찰력 때문이다.

우리가 진리의 말을 바로 구분하고 교육 수준(literacy level)을 높이지 않는다면, 성경은 제 3 천년기에(in the third millenium)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한 나의 해답은 포함시킬 텍스트들을 줄이기도 하고 늘리기도 하여 정경을 재편집하여 새로운 신약을 만들자는 것이다.

 

F. 새로 시작된 탐구(The Renewed Quest)와 정경

 

예수 세미나가 발견한 것들이 불러일으킨 분노를 보고 판단해본다면 역사적 예수에 대한 새로 시작된 탐구는 정통과 정경에 대한 계속적인 심각한 공격에서 하나의 중요한 요소로 생각된다.

역사적 예수 탐구는 17세기에 이미 역사가들이 시작한 것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일 뿐이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탐구자들은 복음서들 안에 있는 사실과 허구 사이의 차이를 더욱 분명히 하였다. 복음서 안의 다른 재료와 대조시켜 역사적 예수의 이미지를 파악하려는 의미를 가진 말씀들과 일화들을 분리시킴으로 우리는 정경의 울타리를 축소시키는 듯싶다. 확실히 그것은 정경 안에서 정경을 분리시키는 또 다른 시도일 뿐이다. 그러나 정경 안의 이 정경은 초기 재료들에 전도자들이 덧붙인 정통 이야기 틀과 긴장 관계에 서 있음이 드러났다. 간단히 말하면 떠오르는 역사적 존재의 모습은 그를 둘러싼 신화적 이야기 틀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한편으로는, 대부분의 이야기 복음 전승은 허구로 구성된 것이라는 우리의 확신이 더해 감은 정경 복음서들의 신학적 유효성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고 있다. 많은 학자들과 신자들에게 역사적 신뢰도와 신학적 유효성과는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 논조는 이렇다. 만약 기독교 신앙이 신약 복음서들 속에 있는 나사렛 예수를 대변하는 신앙이고 그 복음서들은 예수에 관한 역사적 정보와 함께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면, 그들은 신앙의 토대가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복음서들이 그리는 예수는 신앙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예수에 대한 비유, 금언(aphorisms)과 대화들은 4세기의 이야기 틀이나 신학적 형식화 방식에 쉽사리 자신들을 내어주지 않는다.

예수는 떠돌아다니는 지혜 교사이었다. 그의 이름에서 생긴 많은 전승들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는 일련의 비유, 금언과 대화에서 그의 목소리는 나오고 있다, 그러한 말씀들과 그와 상관되는 행동들 속에서 우리는 예수의 비전 곧 그가 하느님의 영역 또는 나라라고 부르는 비전을 때때로 엿볼 수 있다.

비전은 단편들 속에, 임의적인 돌발적 통찰력(random stunning insights) 안에 나타나는 것이지 지속적이고 명확한 전체로 나타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러한 단편적 통찰로부터 어떤 의미의 전체를 맞추어 나가기 시작할 수 있다. 종합하여 보면 이러한 단편들은 우리에게 역사적 현인의 어렴풋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의 하느님 나라 비전은 어렴풋한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그가 어렴풋이 본 것을 어렴풋이 보는 것(a glimpse of his glimpse)이다.

복음서들에서 흘러나오는 희미한 불빛 가운데 예수의 이야기 방식의 어떤 특성들이 있다. 예수는 하느님의 영역을 매일 매일의 일상적 용어-저녁 먹기, 강도 만난 여행자, 빈둥거리는 아들, 배고픈 자들과 눈물 흘리는 자들, 세리들과 창녀들, 숨겨진 동전들-로 말하였다. 그의 언어는 구체적이고 명확하였다. 결코 추상적인 언어를 사용한 적이 없는 것 같다. 신학적 서술 같은 것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은 죄를 지었고 하느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했다."라든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는 말을 한 적이 없다. 그가 사물을 보는 방식과 일맥상통 하는 것이지만 예수는 "하느님은 사랑이다."라는 말과 같은 주장을 하지도 않았다. 예수에게 신론 따위는 없었다. 다만 하느님을 경험하였을 뿐이다.

그의 언어가 그 주위의 일상 세계로부터 나온 것이었지만 일상적 현실을 그가 염두에 둔 것은 아니다. 그의 언어는 간접적이다. 아주 상징적이고 은유적이다. 누룩의 비유는 빵 만드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겨자씨와 씨 뿌리는 사람 비유는 정원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되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 꾸어주라는 그의 훈계는 은행 업무와는 무관한 것이다.

예수는 율법과 전통을 딛고 넘어서는 자유를 누렸다. 그 자유스러움과 그의 말하기 형식의 새로움은 서로 보조를 맞추고 있다. 예수의 말에는 긴박함(immediacy), 뚜렷함(directness)과 자연스러움(spontaneity)이 있다. 서기관들이 하는 것처럼 의식적으로 전통을 만들어내려고 하지 않는다. 그의 말은 듣는 이가 직접 마주하는 바로 그 현실에 집중되고 있다. 따라서 예수 전승은, 그의 수사학적 전략에서 중심 역할을 하지 못했던 기록된 텍스트는 물론이고, 공식적인 구전 전승-율법과 그 해석을 물려주는 것-과도 대조적인 것이 된다. 예수 자신은 아마도 읽거나 쓰지 못했던 것 같다.

윤곽을 자세히 그리지 않고 예수는 한 전승을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보지 못한 미래에 완전히 열려 있는 것이었다. 예수는 자신이 의미하는 바를 세부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하느님 나라의 지평을 가리키려 하였다. 예수는 일상의 구체적 사건을 통해서 일상을 넘어선 영역을 보았으며, 다른 말로, 일상 속에서 참 존재를 엿보았다. 그는 관습을 깨트리고 적을 돌보는 사마리아 사람들, 집으로 돌아오는 탕자, 터무니없는 임금을 받은 노동자들의 멋진 다른 쪽을 열어 놓는 새로운 차원을 불러들임으로 매일의 일상성을 뒤집어 놓았다. 사랑 받아야 할 적과 미워해야 할 가족, 되갚을 수 없는 사람에게만 꾸어주는 은행가, 구걸하는 모든 거지들에게 무엇인가를 주는 사람들, 연명하려고 애쓰면 생명을 잃게 되기에 생명에는 개의치 않는 사람들의 매일 매일의 일상성을 뒤집어 놓았다.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 또는 사람의 아들(기술적 의미로), 하느님의 아들(역시 제한적인 의미로)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 그는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라는 것과 같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그 안에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았다. 여러 수난 예고들은 소위 예수의 메시아적 자의식의 결과가 아니라 전도자에 의해 창작된 허구라고 생각하는 데는 상당한 이유가 있다. 예수는 자신이 어떤 천상의 기적으로 동정녀에게서 태어났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인류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고 믿지도 않았다. 아마도 그는 모세와 예언자들에 자신을 비교하지 않았을 것이며, 자신이 삼위일체의 제 2위라고 생각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존 힠(John Hick)이 그 문제를 명확하게 하였다. "역사적 예수는 후대 기독교인들이 그에 대해 생각해낸 신성을 주장하지 않았다." 그는 이어서 묻는다. "예수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예수에 대한 그토록 중요한 것들을 교회가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우리 모두들에게 그리고 힠에게 궁극적으로 그 질문은 나사렛 예수의 중요성에 대해 교회가 내린 선포들이 모든 역사적 판단들 보다 우선할 만큼 교회는 신성하게 임명된 제도인가 하는 문제이다. 어떤 교회인가라고 묻지도 않고 정색으로 아직도 우리가 이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은 얼마만큼이나 교회의 가르침 안에서 신학적 담론이 그 자기 초월성(self-transcendence)을 잃어버렸는지를 말해주는 지표이다. 랏징거(Ratzinger) 추기경이 뻔뻔스럽게도 주장한 바와 같이 교회(로마 교회, 희랍 정교회, 감리 교회?)는 성령의 인도함 아래 있어왔으며 따라서 교회의 결정은 믿을만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앞으로는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그 선포의 내용을 검토하지 않고서 교회 공의회의 결정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할 방법이 우리에게는 없다. 우리는 전승의 역사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에 비추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신학적 논쟁의 중재자로서 교회, 성령, 정경에 상소함은 단지 속임수를 연장시키고 위기를 더 깊게 할 뿐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정경은 구실을 계속하게 만드는 하나의 결정적 요소이다.

예수 세미나가 토론을 공개화시킴으로써 복음서 연구는 최근의 논쟁의 초점이 되었다. 그것이 최근의 논쟁의 양태를 바꾸어 놓았다. 이제 쟁점은 대중들의 자리로 나와 있는 셈이다. 모든 성서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참여하여 무엇인가를 하여야한다.

 

 

3. 필요한 것: 새로운 개념과 새로운 정경(Needed: A New Concept and a New Canon)

 

 

A. 정경의 새로운 개념(A New Concept of Canon)

 

예수 세미나의 작업으로 떠오른 예수의 역사적 모습의 윤곽은 해롤드 불름(Harold Bloom)이 내린 "정경적" 문학작품의 정의를 내게 상기시킨다. 그가 서구의 위대한 산문과 시의 정경으로 뽑은 26개 작품들은 모두 막강한 시인(strong poets)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시인들은 그들의 시대와 장소 속으로 뚫고 들어가는 힘(intrusions)으로 무대에 등장한다. 한 정경 작품에서 "당신은 한 낯선 사람, 기대가 충족되는 것보다는 엄청난 놀라움에 마주하게 된다"라고 불름은 쓰고 있다. 막강한 시인들은 어떤 식의 독창성을 바꾸어 들이는데, 독창성은 처음 만날 때는 이상야릇해 보이고 놀라게 하고 심지어 겁나게 만들기도 한다. 불름이 말하기는 그들 안에서 우리는 위대함을 직접 마주 대하게 된다. 그들의 말은 받아들여진 전통과 동화될 수 없다. 오히려 시간이 지나며 그 말들은 우리를 그 낯섦에 동화시켜서는 더 이상 우리가 그들을 이방인으로 간주하지 않도록 만든다. 그들의 광기는 우리의 멀쩡함(sanity)의 기준이 되었다.

30년 전 예수의 비유와 금언들에 관하여 우리가 배웠던 것을 뷸름은 상기시키고 있다. 당신들이 예수가 진짜로 했던 말들(authentic words of Jesus)에 마주한다면, 그리고 그 말들을 둘러싸고 있는 맥 빠지는 산문체 껍질을 벗긴다면,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구덩이에 팽개쳐진 희생자만큼이나, 한 데나리온을 받고 제 11시에 고용된 사람들만큼이나, 큰 연회에 멋모르고 끌려간 거리의 사람들만큼이나, 집으로 돌아온 탕자만큼이나 당신도 놀랄 것이다. 우리들의 놀라움은 저들의 놀라움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예수의 추종자들은 오래지 않아 그들의 놀라움을 거의 망각하기 시작하였다. 그 놀라움을 전해준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힘들게 (로마)제국을 정복하는 싸움에서 실제적이지도 않고 유용하지도 않은 것은 잊어야 했었다. 그렇지만 놀랍게도 정경 복음서들과 바울의 비전 속에는 우연한 흔적들이 여기 저기 남아 있다. 그러나 그 이외 다른 곳에서는 거의 모두 즉시 지워지고 말았다.

예수와 바울만이 신약의 권위 있는 목소리들인데, 그 목소리들은 평범한 도상학(iconography)과 전수된 미덕 목록에 억지로 덮어씌워져 질식되어왔다. 이 과정은 세 개의 단계로 일어났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공동체는 구전에서 기록으로 옮겨감으로 원래의 야생적인 비전을 고착화시키고 협소화시켰다. (상기시킨다면 구전은 기록되어도 그 구전성을 잃지 않을지도 모른다. 구전성은 여기에서 하나의 은유라는 말이다.) 그런 후에 서신의 교정자들, 전도자들과 편집자들이 나타나 예수와 바울을 숨도 못 쉴 밀폐된 공간에 가두어 버렸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 단계로 예수와 바울의 깜짝 놀라게 하는 표현들은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들, 전수된 신화, 속담 같은 민담에 흡수되어버려서는 그 천재성이 사라지게 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어떤 것이 읽어도 안전한 것인가를 결정하는 주교의 명령으로 인증 받아서 읽혀지는 것으로 정경은 전락하게 되었다.

그런 과정은 기독교 전승 역사에서 계속 되풀이되어 왔다-부분적인 재발견, 성령의 폭발, "신조파(creedal party)" 혹은 "정경파(canon party)"에 의한 억압의 되풀이. "신조파"는 예수와 바울이 무엇(을 말하고 행동한 것)이었는지를 자기들 나름으로 만들어내기를 선호하며, 다루기 힘든 견해들은 기꺼이 탄압한다. "정경파"는 예로부터 해왔던 형식화 방식(formulations)에 점수를 준다. 그러나 본래의 예수와 바울에게는 같은 대우를 해주려하지 않는다. 그리고 저들이 근래에 명문화시켜 놓은 것을 현대의 전문 학자들은 대부분 고분고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첫째 양식비평(form criticism)은 기록된 복음서들의 배후로 넘어가 그 다양한 형태 그대로의 예수전승을 회복하려는 의도로 생겼다. 양식비평은 기록된 것을 뒤엎으려는 시도라고 맹렬히 비난받게 되었다. 우리들은 우리들이 재구성한 헬라어 텍스트에 나타나 있는 대로 복음서들과 서신들을 연구하라고 주의를 받았다. 그리고 편집비평(redaction criticism)이 나왔는데 전승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정신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고, 전도자 한 사람 한 사람이 어떻게 예수와 바울을 해석했는가에 집중할 것을 요구하였다. 편집비평의 보호 속에서 마가, 마태, 누가는 예수를 대체하는 초기 비전의 산실이 되었다. 마지막으로 (독자)반응비평(response criticism)이 머리를 처 들고는 마지막 아첨을 떨었다. 예수와 바울은 읽는 사람들이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내가 최종적인 권위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든 싫어하든 간에 블룸이 의미했던 대로 낡은 신약(the old New Testament)은 이미 오래 전부터 정경이 되지못했다. 존슨(Luke Timothy Johnson)이 목회서신 주석을 쓴 것이 놀라운 일인가? 목회서신은 역사적 바울을 거의 애매모호하게 만들었다. 목회서신들은 바울을 교회 매니지먼트 지침서로 대체시켜버렸다. 그것들은 바울 전승으로부터 마지막 남은 한 방울의 창조성마저 다 짜내어버렸다.

신조파들이 사도신경의 신화가 둥지를 튼 마가복음의 틀이 되는 이야기들(framework stories)을 선호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혹자는 그 이야기 틀로부터 한 구절을 끄집어내어 오래된 로마신조의 처음 판을, 그리고는 거기로부터 4세기 이후의 니케아 신조와 사도신경을 일직선으로 그려낼 수 있다. 이런 신조들은 역사적 예수의 최종적 추상화를 만든다. 대부분의 신조파의 당원들에게 금언과 비유 속의 예수는 아무 쓸모도 없는 것임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이다. 그들은 예수를 어떻게 다루어야할 지를 몰랐다. 최근의 한 인터뷰에서 우리를 비판하는 한 사람은 이렇게 요약한다. "예수가 말하기를 만약 네가 나를 따르고자 한다면 네 생명을 포기하고 네 십자가를 지고 너의 모든 소유를 포기해야한다. 이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하는 까다롭고, 엄격한 예수이다." 그것은 수도원 종파의 예수이다. 그것은 신조파 예수의 축소판이다. 비유의 예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정경의 텍스트들을 정통 신조와 하나로 보는 것은 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해온다. 본래의 비전이 다시 회복되어 우주 물리학과 전승 발생사의 현대적 이해에 맞는 새로운 기반(matrix)안에서 다시 새롭게 신화화될 수는 없을까? 이것은 우리에게는 떼어버릴 수 없는 문제로 남는다. 신조의 신화적 기반의 붕괴를 통해 드러난 모습에서 우리는 복음서 전승의 어떤 부분은 고대의 신화적 기반에 의존하고 있지 않았음을 본다. 예수의 역사적 모습은 원래의 신화 틀(original framing myth) 없이 어떤 복음서를 만들 가능성-현대에 맞는 새로운 이야기/새로운 신화로 받아들여질 가능성을 우리에게 제공할지 모른다.

이러한 문제는 내가 말하는 다시 시작된 탐구(the renewed quest)와 소위 제 3의 탐구(the third quest--이것은 N. T. Wright가 처음 쓰기 시작한 말로, 여기서 Funk는 예수의 유대/팔레스타인 배경만을 중시한 이들 학파를 비평하는 듯하다--편집부)라고 부르는 것 사이의 본질적 차이를 명확하게 하고 있다. 제 3의 탐구에서는 본래의 신화적 기반이 구조될 수 있는가 여부에 모든 것이 달려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왜냐하면 그 기반이 복음의 본질이라는 주장을 우리가 듣기 때문이다. 제 3의 탐구는 예수의 비전에는 별 관심이 없고-금언들과 비유들에 관심이 없는 것을 보라-이야기 복음서들과 신조들에 있는 예수에 대한 "사도적" 해석에 관한 수비적 자세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런 반면 다시 시작된 탐구는 시대의 요구와 자료가 이끌어가는 곳이라면 어느 곳이라도 기꺼이 가려고 하고 있다. 다른 가능성들에 우리의 눈을 여는 것은 신화를 만드는 성격이 옹호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류 문명의 진화 속에서 우리 시대와 장소의 손길에 맡겨져 있다.

그러므로 제 3의 탐구가 아니라 다시 시작된 탐구는 오늘 우리가 당면한 모든 기본적 신학적 쟁점들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한편으로는 정통적인 신앙의 선언에 세계관의 변화는 점점 더 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다. 현재의 과학적 세계관과 정통적 신조 사이에는 서로 맞지 않는 것이 무시해 버리기에는 너무 많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최근의 복음서 연구역사는 전통적으로 모아놓은 기독교 경전이 말하는 모든 정통적 주장들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왔다. 신약은 더 이상 (오래된, 사도적인, 영감으로 된) 권위를 가진 경전으로 자리 매김하는 기준 어느 것도 만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정경의 복음서들은 심하게 뜯어 고치지 않은 모습의 나사렛 예수의 초상화를 우리에게 보여주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쓸만한 정경 하나도, 역할을 제대로 하는 신앙 선언 하나도 남겨져 있지 않다. 크리스천 전승에 관하여 이 두 가지 기본적인 사실을 안다는 것은 제 3 천년 시대에 그 전승을 살아남게 하는 것일지 모른다. 나는 21세기에서 말하고 있지만 교회가 당면한 위기가 더욱 깊어져 앞으로 100년 이내에는 교회가 정신을 차리고 그 위기를 제때에 해결할 것이라는데 의구심을 갖고 있다. 신들의 물레방아는 아주 천천히 돌아가고 있는 듯싶다.

기독교 전승에서 정경 개념은 일찍부터 굳어지기 시작하여 마침내 감당할 수 없는 신앙의 변형들로부터 정통을 수호하려고 고안된 일련의 주장들이 되어 버렸다. 신조와 정경은 언제나 비정상적인 사람들, 급진적인 사람들, 자발적인 사람들을 따돌리는 역할을 감당해왔다. 달리 말하면 성령을 억누르는 역할을 해왔다. 대조적으로 보다 넓고 세속적인 의미의 정경은 문화적 전통이 태동되는 시기나 꽃을 활짝 피우는 시기에 생겨난 일단의 문학 작품을 의미한다. 이런 넓은 의미로 정의되는 정경은 "정통"이나 "이단" 어느 것에도 신경 쓸 필요가 없다. 영어에서는 고전(the classical canon) 또는 문학 정전(the canon of literature)을 수시로 참조한다. 고전 학자들은 희랍 고전 시기에 나온 작품들이 정통적인 것이냐 아니면 이단적인 것이냐를 왈가왈부하지 않는다. 다만 그 수준이 높은 것인지 낮은 것인지, 희랍의 황금기의 천재성을 얼마만큼 나타내는 작품인지를 말할 뿐이다. 해롤드 불름이 그의 위대한 서구 산문과 시 전집에 포함시킨 26개의 작품들은 위대한 문학이라는 점에서 정통이나 이단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것이다.

크리스천 성경으로 사용될 때 정경은 통상적으로 "성도들에게 단 한번 주어진 신앙(the faith once for all delivered to the saints)"의 한계를 정의하는 고대 문서들로 인식된다. 이 정의는 그런 신앙의 정통성 있는 윤곽이 된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정통성과 그와 관련된 이단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 정경의 정의가 바람직한 것인데, 이는 제한적 의미의 정경은 전승의 천재성으로부터 우리를 격리시킬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넓은 세속적 의미에서 정경이 처음 선구자들의 통찰을 후세 사람들이 접근할 수 있는 길을 제공해주는 어떤 모양으로든 일단의 문서들로 이해될 때, 정경이란 그 기초가 되는 문서들에 그 스스로의 비판적 힘을 주입시키기를 원하는 전승의 구성요소일 뿐이다.

 

 

B. 새로운 신약을 위한 제안들(Proposals for New Testament)

 

댓글목록

박원일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박원일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조장로님, 드디어 직접 글을 올리셨군요. 환영합니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을 위해, 한 마디 첨가하면..
Lee Martin McDonald and James A. Sanders (eds.), The Canon Debate (Peabody, Mass.: Hendrickson, 2002), pp. 541-557에 실린 글을 완역한 것입니다. 아마도 펑크(1926-2005)의 마지막 글쓰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들 '신학다시하기' 관점에서, 성서의 다양한 전승/이해에 귀 기울이기를 촉구하고 있습니다.

desertgardener님의 댓글

profile_image no_profile desertgardener 쪽지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새길 가족들이라면 이런 글에 관심 가질 것이라 생각하고 올렸습니다.신학 다시하기에 도움이 되기를....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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