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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 정치를 두려워 말라(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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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여, 정치를 두려워 말라

구조를 바꾸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
newsdaybox_top.gif2011년 11월 12일 (토) 23:34:20 [조회수 : 367]짐 월리스 btn_sendmail.gif 메일보내기 )newsdaybox_dn.gif

<소저너스>는 "성경적 정치(biblical politics)"를 이해하고 옹호하려 애써왔다. 대선을 일 년 앞두고 이 말이 뜻하는 바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얼마 전에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친 한 기독교 지도자와 이야기할 기회가 있었다. 그는 풀뿌리 방식으로 접근했다. 그는 가난하고, 사실상 모두가 마이너리티인 공동체에 살며 저소득층에게 기본적인 민원서비스를 제공한다. 그가 말하길 "당신이 만약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산다면, 당신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부당함과 부딪치게 될 것이다"라고 했다.

  
 
 ▲ <소저너스>지 40주년 기념호. 
 
다른 말로 하면 가난은 사고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가난과 인간의 고통을 만드는 불평등한 구조와 시스템이 존재하고 있다. 아무리 도와줘도 부족할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의 태도를 바꾸려는 노력과 기관의 노력이 합쳐져야 가난의 원인을 제거할 수 있다.

불평등을 개선하기 위해선 당신은 결국 정치와 맞닥뜨려야 한다. 영국의 노예제 폐지론자였던 윌리암 윌버포스는 영국 기독교인들에게 단순히 노예를 풀어주라고만 말하지 않았다. 그는 노예 거래 자체를 끝내고 싶어했다. 노예 거래를 중단시키는 것은 지난한 정치적 캠페인을 요구하는 일이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단순히 미국 기독교인들에게 흑인들에 대한 차별을 하지 말라고 주장했던 것이 아니다. 그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민권법과 투표권 보장법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두 법안은 백악관과 연방의회의 의지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런 모든 변화에는 정치적 성과가 필요했던 것이다.

또 다른 내 친구는 윌버포스에 관한 영화인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다섯 번이나 봤노라고 말했다. 그는 그 영화에 매우 감동 받았다고 했다. 나 역시 웨슬리교파로 회심한 후 노예 제도 종식을 인생의 목표로 세운 한 사람의 이야기를 보며 깊은 감동을 느꼈다. 그런데 그 영화는 영국을 휩쓸었던 노예 폐지 운동은 잘 보여주지 않은 채 너무 한 사람에게만 조명을 비추고 있었다. 결국 정치적 승리는 그 운동 자체의 힘이었는데 말이다.

마찬가지로 민권운동을 불러일으킨 힘은 킹 목사의 연설에만 있지 안았다. 버밍햄 캠페인과, 셀마에서 있었던 극적인 사건들, 몽고메리까지의 행진 등이 전국의 이목을 집중했고, 이것이 민권운동의 법제화의 기폭제가 된 것이다.

정치를 바꾸는 일에는 운동이 수반된다. 수백 만의 사람들의 힘이 결집돼 하나의 방향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할 때만 그 힘이 워싱턴 정가에 전해진다. 워싱턴은 변화를 자기 손으로 시작한 전례가 없다.

  
 
 ▲ 워싱턴디씨에서 열렸던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연설한 "직업과 자유를 위한 행진". (출처 : 위키페디아) 
 
이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이다. 성경은 정의의 하나님을 드러낸다. 정의의 하나님은 단순히 자선을 베푸는 하나님이 아니다. 탄압과 정의 같은 단어들이 성경을 채우고 있다. 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들의 심판을 받는 가장 보편적인 대상들은 누구였던가. 왕, 지배자, 사사, 고용주들이었다. 세상의 정부와 경제와 법원과 구조를 쥐고 흔드는 부자들과 권력자들에 대해서 예언자들이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이들이 가난한 자들과 궁휼한 자들을 막대할 때 성경은 이를 단순히 불친절하다고 하지 않았다. 성경은 이런 행동들이 잘못됐고 불의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행동들이 바로 하나님을 화나게 한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성경이 항상 주목하는 대상은 과부와 고아와 가난한 사람과 억압받는 사람과 법정의 희생자들과 부당한 고용주에 희생당한 사람들과 빚진 자와 낯선 땅에서 배척 받는 이방인들이다. 예언자들의 메시지의 주제는 항상 땅과 자본과 법적 권위와 고용의 힘과 독재와 힘을 거느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게로 집중되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상 정치인 것이다.

어떤 이들은 대중들의 결정을 사적으로 만들고,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으며, 가난의 문제를 제도로 고치는 대신 자선으로 해결하려고 하고, 규제를 완화시켜 하고 싶은대로 하려는 기업의 엘리트들과 힘있는 자를 내버려 두며, 정부의 역할과 규모를 가능한 한 축소시켜 정치적 힘을 줄여버리는 것을 자신들의 목표로서 자랑스럽게 주장한다. 나는 성경과 예언자들의 메시지가 이런 사람들을 몹시 수상쩍어한다고 믿는다. 큰 정부냐, 작은 정부냐로 구도를 가져가서는 절대 안 된다. 자못 정부라함은 힘과 부를 공공의 이익을 위해 쓸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작으면서도 효과적인 곳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성경적 정치는 결코 대권후보자들에  국한된 것이 아니지만 몇몇이 최근 선거에서 이런 실수를 범했다. 우리의 희망을 정치인 후보나 특정 정당에게 건다면 실망과 화와 위험한 냉소주의에 빠지게 된다. 정치적 아젠다의 한계를 만들고 뒷받침하는 구조와 시스템이 존재한다. 이러한 구조와 시스템을 제거하는 것이 정치적 한계를 극복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활동은 결국 예언자적 사명이 될 수밖에 없다. 결국 바람을 일으키는 것은 운동이다. 정치적으로 바람을 일의는 방법이 유일하게 워싱턴의 정가를 바꿀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

신앙의 사람들은 오직 위의 도덕적 이슈들 때문에 정치에 관여하는 최후의 무소속 정치인들이다. 이 도덕적 이슈들은 우리의 관심과 의지를 모든 정치적 사안들을 향해 도전하도록 명령한다.

무소속 정치인들은 선거의 승리를 위해 타협하는 종교적 지지자/신봉자들보다 더욱 정치를 변화시킬 것이다. 당파적인 정치적 목표가 아닌 정의를 위한 투쟁은 성경적 정치의 핵심이고, 이것은<소저너스>의 소명/사명으로서 계속될 것이다. 

글·짐 월리스 <소저너스> 대표 / 번역·김성회 기자

* 이 글은 <소저너스>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출처: http://www.newsnjoy.us/news/articleView.html?idxno=2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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