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와 신학--독서토론

기독교의 심장--마커스 보그 저, 김준우 역--조성철 리뷰 (펌)

본문



기독교의 심장은 무엇인가?
오늘날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이 두 가지 질문으로 말 문을 여는 저자는 '확신과 열정'으로 이 책을 쓴다고 밝힌다. 
'기독교가 오늘날에도 말이 되며 의미가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갈등과 변화의 시대에 '과거의 기독교 이해방식이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열정으로 자신의 '학문적 연구, 체험, 기억을 통합한 책'이라고 한다.

이제까지 그가 쓴 여러 권의 다른 책들의 내용을 되풀이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는 아쉬움이 있지만, 기독교에 아직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회중들(위계 질서를 넌지시 비치는 평신도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내가 달리 표현한 말)을 위해서 글쓴이 특유의 입담(storytelling)과 아주  쉬우면서도 설득력 있는 문체로 쓰여진 좋은 책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그토록 사랑하는 교회에 가서는 들을 수 없고 물을 수도 없는 것들을 이 책에서는 읽을 수 있다는 이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사람들의 눈길을 강하게 끌어 당기는 것은 제목에 있는 '심장'이라는 단어인 것 같다.
사람은 누구나 심장이 무엇인지,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다. 자신의 생명과 직접 관련되어 있기에 사람들에게 이 단어는 매우 호소력 있는 단어이다.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저자는 많은 독자들을 끌어들이고 있다고 본다. 심장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믿고 있는 사람들 까지.

마커스 보그는 기독교의 심장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아무리 세상이 많이 변했으며 변화하고 있다고 해도 '성서와 하나님과 예수'에 대한 전통이 기독교의 심장임을 인정하고있다. 문제는 이것을 이해하는 방식(paradigm)이다. 그 패러다임에 대한 이야기가 이 책의 내용이 된다.

기독교에 대한 이제까지의 이해방식을 '과거의 패러다임(earlier paradigm)이라고 부른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믿었던 방식이다.' '이 과거의 방식은 성서를 하나님의 유일한 계시로 간주하며, 성서의 문자적 의미를 강조하고, 기독교인의 생활을 나중에 구원받기 위한 현재의 믿음, 즉 하나님, 성경, 천당에 가는 길로서의 예수를 믿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전형적으로 이 입장은 기독교를 유일한 참된 종교로 본다.'

변화하는 시대의 새로운 패러다임
이러한 '과거의 이해방식이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보그가 설명하며 주장하는 '새로운 패러다임 (emerging paradigm)'은 '기독교의 심장에 관해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는 오늘의 교회에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전체를 보는 방식 곧 종합적 이해방식'이라는 것이다. '패러다임의 변화는 기독교 "전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 관한 변화다. 똑같은 "현상들"(하나님, 성서, 예수, 교리, 신앙 등)을 보지만, 다르게 보는 것이다.'

기독교의 심장을 전체로서 보는 데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기독교 전통(the Christian tradition)과 기독교인의 삶(the Christian life)을 어떻게 보는가 하는 문제임을 전제하고, 성서 무오설과 성서문자주의를 핵심으로 삼는 과거의 패러다임은 우리들의 오해와는 달리 사실은 '"기독교 전통"이 아니라, 기독교 전통을 이해하는 특수한 방식이며 비교적 최근의 방식으로서, 지난 몇 백 년 동안에 걸쳐 현대성과의 갈등에 의해 생겨난 방식임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기독교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패러다임 역시 현대의 산물'임을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29-30쪽)

계몽주의에 대한 응답으로 한 세기 전 쯤부터 나타난 새로운 패러다임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는 다섯 개의 형용사를 사용하여 두 문장으로 설명한다. '처음 세 개의 형용사는 성서(와 기독교 전통 전체)를 보는 방식을 설명하는 역사적(historical), 은유적(metaphorical), 성례전적(sacramental)이라는 형용사이다. 다음 두 개의 형용사는 기독교인의 삶을 보는 방식을 설명하는 관계적(relational)이며, 변혁적(transformational)이라는 형용사이다.' 보그가 말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해하는데 이 형용사들은 굉장히 중요할 뿐 아니라 읽는이의 상상력을 요청하는 언어들인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새로운 패러다임에 일방적으로 호의적인 독자들의 허를 찌르려는 뜻에서인지, 아니면 새로운 패러다임에 일방적으로 적대적인 독자들 까지 아우르려는 뜻에서인지 보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따라서 문제는 기독교를 이해하는 두 가지 패러다임 가운데 어느 하나는 올바르고 다른 하나는 틀린 것이라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그 패러다임이 "작동하는가" 아니면 "방해가 되는가"하는 문제이다....만일 과거의 패러다임이 당신에게 그 기능을 발휘한다면...당신은 패러다임을 바꿀 이유가 없다.
그러나 또 다른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는 과거의 패러다임이 더 이상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그들에게 설득력이 없는 과거의 패러다임은 걸림돌이 되어버렸다....이들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새로운 패러다임은 기독교와 기독교인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39) 

2장에서 기독교의 처음 이름이 "길(the Way)이었음을 상기시키면서 신앙의 중심성을 '심장의 길'이라는 표현으로 시작하며 보그는 그 의미를 네 가지로 분석한다. 
그 가운데 '충실함으로서의 신앙(faith as fidelitas)'과 '보는 방식으로서의 신앙(faith as visio)'은  '관계를 맺는 것을 강조'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주목을 요하는 의미라고 본다. 신앙은 명사형이 아니라 동사형이어야 한다는 말을 기억나게 하는 의미 제시이다.

여기에서 사도신경과 니케아신조에 나오는 첫 번째 단어인 'credo'를 저자는 심장과 관련 있는 말로 밝히고 있는 것을 주목하게 된다. 이 말은 흔히 "나는 믿습니다."라고 번역되어 "나는 동의합니다."라는 뜻으로 이해된다면서, '그러나 credo는 "나는 다음과 같은 선언들의 문자적-사실적 진리에 동의합니다"라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그 라틴어는 "나의 심장을 바칩니다(I give my heart to)....자신의 심장을 바치는 것으로서 '크레도'는 "나는 충성하겠습니다" "나는 헌신하겠습니다"라는 뜻'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69) 이 원초적 의미를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는 신앙의 동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충실함으로서의 신앙'을 삶으로 구체화할 수 있지 않을까?

역사적 기억과 은유적 이야기: 성서
기독교 전통의 심장으로서 성서는 기독교인의 정체성의 표시이다. 문제는 지난 세기 많은 사람들이 성서가 걸림돌이 되어 성서때문에 교회를 떠났다는 점이다. 그들에게 성서는 더 이상 말이 되지 않는 이상한 책이 되어 버렸다. 여전히 교회에 남아 있기는 하지만 억지로 믿어야 하는 것들과의 씨름 속에서 새로운 믿음을 아직도 찾지 못한 상태로 허우적거리는 사람들에게 저자는 성서를 '역사적, 은유적, 성례전적'으로 이해할 것을 제시한다. 성서는 '역사적 기억과 은유적 이야기를 결합'시킨 것임을 상기시키면서, "신학은 시에 무엇인가 덧붙여진 것이지, 과학에서 무엇인가를 뺀 것이 아니다."라는 스웨덴 속담을 멋지게 인용하고 있다. 이 인용 자체가 아주 은유적이지 않은가?

언제나 그럴듯 하면서도 알듯모를듯 전개되는 하나님 설명에서 보그는 중요한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당신의 하나님의 성격은 무엇인가?'(123) 
나는 몇 년 전부터 스스로에게 이렇게 묻고 있다. '하나님의 색갈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우리는 경험하고 있다고 본다. 때문에 하나님의 성격을 묻는 이 질문은 내가 지금 서 있는 신앙의 현 주소를 바로 알아야 함을 일깨우는 물음이다. 과정신학자 죤 캅도 그의 책 <생각하는 기독교인이라야 산다>에서 이 점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마음 예수
예수는 '하나님의 마음'이라고 명시하는 마커스 보그는 '성서보다 우선'하는 예수에 대한 과거의 이미지는 더 이상 설득력이 없다고 못박으며, 그의 독자적인 표현법인 '부활절 이전의 예수(pre-Easter Jesus)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post-Easter Jesus)'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그런 구분을 하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가 부활절 이전의 예수와 부활절 이후의 예수 모두를 잃어버릴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135)  
'과거의 신적인 존재"가 되어버린 예수는 이 땅에 다시 올 때까지는 '여기에 없다. 이처럼 우리는 여전히 이곳에 존재하는 살아계신 예수...부활절 이후의 예수를 잃어버리게 된다.'고 경고하고 있다.

사회적 예언자,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열정적인 주창자, 그리고 지배체제에 대한 급진적 비판자로서 '그의 정치학 때문'에 처형당한 예수를 속죄신학에서 말하는 것처럼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다" 라고만 해석하는 것은 오늘의 교회에 '시체로서만 나타'나는 예수를 '계속해서 못박음으로써 그의 입에서 단 한 마디도 나오지 못하도록' 만들고 있다고 신랄하게 비판한다. 

예수의 죽음은 '그가 하고 있었던 일의 결과'이었으며, 그는 '..알고 있었지만 용기 있게 자신의 하던 일을 계속했다.'고 해석하는 보그는 '하나님의 은유와 성례전으로서의 예수'는 '하나님의 마음이 육신으로 나타난 분(the heart of God made flesh)'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변화하는 시대에 새롭게 터나오는 패러다임(emerging paradigm)으로 기독교 전통은 물론 성서와 하나님 그리고 예수를 해석/이해하는 포스트모던 기독교인들은 신약성서의 하나의 중심 개념인 중생을 '새로운 삶의 시작'으로 보게 되어 '기쁨에 들뜨고(rhapsodic) 동시에 현실적(realistic)'인 새로운 삶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옮긴이는 rhapsodic을 "열광적"이라고 번역하였다. 틀린 것은 아니지만, 방향 감각 없이 맹목적으로 신앙에 열광하는 오늘의 교회 현실을 염두에 둔다면 오해의 여지가 많다고 보고 바꾸어 보았다.)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정의에 대한 반대는...인간의 불의'라고 규정하고, 구조적이고 사회 정치적인 체제적 불의(systemic injustice)에 대한 '성서의 정치적 열정'이 외치는 '성서의 중요한 목소리들'의 역사를 살핀 후, 예수 이야기의 핵심인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가 종교적 은유이면서 지극히 '정치적 은유'임을 말한다. 우리가 흔히 놓치고 있는 '예수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의 지상적인 의미'를 들어 부각시키고 있다.(207-212) '성서의 정치적 열정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정치적으로 적극 참여하는 영성(politically engaged spirituality)을 갖도록 요청한다.'

기독교인의 삶의 중심적인 이미지를 "길"로 이해하는 경우 죄와 구원이 도덕적이고 저 세상적인 것이 아닌 '이 세상적인 현상'이 된다. 그 때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서는 많은 설교를 들어왔지만,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에 관해서는 별로 그 중요성을 강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이러한 깨달음에 이른 기독교인들은 예수의 메시지와 삶이 지극히 공동체적이었음을 인식하게 되고, '우리 시대의 기독교인들은 정치적인 사람들이도록 부름받고 있다.'는 자각을 갖게 된다고 보그는 결론짖고 있다.(307)

책을 마무리 지으면서 그는 매우 시사적인 제안을 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의 재정 관리를 말하면서 '우리 기독교인들은, 보다 더 정의를 구현함으로써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는 단체들에 우리의 전체 기부금의 50%를 보내도록' 제안하고 있다. '고통을 만들어내는 조건 자체를 변화시키려고 노력'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제안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헌금은 몽땅 출석교회의 몫이라고 주장하는 교회들이 적지않은 현실에서, 구호 기관에 기부하는 것까지도 넘어서서,구호가 필요한 세상을 만들어 내는 세상의 지배구조를 변화시키는 일에 헌신하는 단체들에게 절반의 기부금을 보낼 것을 촉구하는 보그의 제안은 헌금에 대한 기독교인들의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킬 것을 요청하는 제안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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